(ASMR)
# 오전 1시 30분, 워커 가문 저택 테라스
수많은 별들이 하늘을 가득 메워 총총히 빛나는 밤. 엘더, 테라스 난간 앞에 기댄 채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 높이 떠오른 보름달의 밝은 빛이 엘더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잠시 후, 페레그린이 테라스 문과 가까운 뒤쪽에서부터 등장한다.
페레그린 : 워커 씨! (엘더의 옆으로 다가가며) 아직 안 주무셨네요?
엘더 : (페레그린 쪽을 향해 돌아보며) …셸레 양.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본 채) …당신이야말로 잠자리에 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페레그린 : 가끔은 이렇게 밤 공기를 쐬는 것도 기분을 상쾌하게 하니까요. (밤하늘을 바라보며) 멋진 밤이네요, 그렇죠?
엘더 : (반쯤 뜬 눈으로 무심하게 다시 밤하늘을 바라보며) …뭐, 그럴지도.
두 사람, 한동안 밤하늘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는다. 페레그린, 엘더의 안색을 살피려는 듯 그를 향해 고개를 기웃거린다.
페레그린 : (걱정하듯) 괜찮으세요? 오늘따라 좀 피곤해 보이시는 것 같던데.
엘더 : …별일 없습니다, 단지-... (느긋하게 하품하곤) …업무 이후 긴장이 풀리다 보니 조금 졸린 것뿐.
페레그린 : 흐음. (엘더의 눈치를 살피며) 뭐, 그럼 다행이지만요.
또한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페레그린, 여전히 엘더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페레그린 : …저기, 워커 씨?
엘더 : (페레그린을 향해 시선을 흘깃하며) …흠?
페레그린 : 한 가지, 당신에게 물어봐도 될까요?
엘더 : (눈을 가늘게 뜬 채) …뭡니까.
페레그린 : 오늘따라 저한테 좀 더 개방적으로 대하시는 것 같은데, 뭔가 잘못 드신 건 아니겠죠?
엘더 : (페레그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페레그린 : …음, 그러니까… (곰곰이 생각하듯) 저희가 늦게까지 함께 작업할 때마다, 워커 씨는 항상 너무 과묵하셨잖아요. 밤이 조금만 늦기 시작해도 단 한마디도 하시지 않는 데다 제가 뭔가 말을 걸려 해도 매번 할 말이 있으면 동이 트고 난 뒤에 하라며 말을 딱 잘라 끊어버리시고 했고. 평소같았다면 아까 제가 처음 워커 씨를 불렀을 때부터 절 내쫓으셨을 텐데, 오늘은 제가 사소하게 말을 걸어도 잘 받아주시는 것 같달까…
엘더, 페레그린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듯 침묵하다 다시 말을 잇는다.
엘더 : …그렇군요. (어쩔 수 없겠다는 듯 심호흡한다.) ...어쩌면 지금이 바로... 제 약점 중 하나에 해당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페레그린 : (잠시 눈을 빛내며) 약점…이라니요?
엘더 :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저으며) …이런 것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팔을 힘없이 떨구곤 고개를 들어 다시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상하게 저는 졸음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밤이나 새벽 시간대에 언행이 솔직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조건에서 누군가에게 한 번 입을 열면 안의 것들을 웬만해선 전부 다 쏟아내려 하는 경우가 가끔 발생한단 말이죠.
페레그린 : (놀라며) 정말요? 뭔가 의외의 모습이네요.
엘더 : (고개를 끄덕이며)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한번 시작했다 하면 고삐를 잡으려 해도 멈추지 않고 고해성사로 이어지는 게 저조차도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어서 말입니다. 전 언제나 공과 사를 철저히 분리해 두는 것을 선호해 왔고, 이런 습관이 있다는 걸 저 또한 알고 있었기에 웬만해선 사무적인 관계의 사람과는 밤엔 말을 섞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만… 그래서 당신에게도 그 이상으로 저의 진솔한 면모를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었죠.
페레그린 : (엘더의 뜻밖의 면모에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듯) 그랬었군요…
엘더 : …어쩌면 이 때문에 그동안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시선을 페레그린 쪽으로 옮기며 고개를 숙인 채) …혹시 그동안 제 태도가 무례하게 느껴지셨다면, 이렇게 사과드리겠습니다.
페레그린 : 아, 아니에요! (손사래 치며) 그저 제가 사려 깊지 못했던 것뿐이니까요. 사과하실 필요까진 없는걸요.
엘더 :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밤하늘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또다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그러던 와중 엘더, 먼저 침묵을 깨고 가만히 페레그린을 부른다.
엘더 : (나지막이 부르며) …셸레 양.
페레그린 : (엘더를 바라보며) …?
엘더 : …최근 림에서 있었던 사건,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페레그린 : 아아, 물론이죠. (고개를 끄덕이며) 림을 점령하려는 다른 독 속성 마법사들에 맞서 용감하게 맞서 싸우셨잖아요.
엘더 : (차분한 목소리로) 그것과 관련해서…한 가지, 당신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페레그린, 자신에게 사적으로 관심이 없는 줄로만 알았던 엘더의 태도에 놀란 듯 잠시 눈빛이 반짝인다.
페레그린 : 제게… 질문이요…?
엘더 : (페레그린 쪽을 흘깃 바라보며 진지하게) 당신은 어째서 그때 독 속성 마법사를 배신한 절 기꺼이 도운 겁니까?
페레그린, 그동안 잘 의식하지 못했던 의외의 질문을 받은 듯 약간 허둥대듯 둘러댄다.
페레그린 : …당신이 그런 걸 궁금해하실 줄은 몰랐는데. 근데 그건 왜요?
엘더 : (단호하게) …전 알아야겠습니다. 질문에만 대답해 주십시오.
페레그린, 잠시 생각하듯 말을 멈추었다가 부드럽게 다시 말을 잇는다.
페레그린 : (차분하게) …저는 고고학자예요, 워커 씨. 림은 우리의 모든 역사가 시작된 곳. 모두의 고향을 잃어버리기엔 너무 많은 삶과 이야기가 있는 걸요. 제가 다른 독 속성 마법사들과 함께 다시 림에 발을 들였던 건, 그저 지난 잃어버린 50년의 세월 동안 그곳이 어떻게 변했나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다른 이들과 같이 침략을 통해 림을 손에 넣어야겠다거나, 파괴해야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죠.
엘더 : (페레그린의 말을 듣곤 약간 인상을 쓴 채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어딘가 감정이 섞인 듯한 어조로) …그렇습니까.
페레그린, 어딘가 불만이 섞인 듯한 엘더의 태도에 의문이 드는 듯 그를 바라본다.
페레그린 : (조심스럽게) 음… 혹시 그때 뭔가 신경 쓰이던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엘더 : … (잠시 뜸을 들이다 작게 한숨을 내쉬곤)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실 림이 파괴되든 말든... 제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페레그린 : 네? (약간 충격받은 얼굴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엘더 : (진중한 목소리로) …제 말은, 물론 좋은 일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은 제겐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일들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났던 비탄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모두의 고향 땅이라곤 해도, 마법사들 사이의 극심한 차별주의로 발생한 수많은 불미스러운 일들은 기본이고, 가족이나 친구들도 모두 지켜내지 못했던 제겐 그저 불온한 저주받은 땅으로 여겨질 뿐이었습니다.
페레그린 : 아… (의문이 드는 듯) 하지만 그럼, 워커 씨는 어째서 배신을 선택하셨던 거죠?
엘더, 대답을 망설이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힘겹게 겨우 입을 연다.
엘더 : (슬픈 눈빛으로) …제 아내의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먼 훗날 일어날 림의 파괴를 막아달라는 것.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페레그린 : (놀라며) 네? 그럼… 림이 파괴될 거라는 사실을 이전부터 알고 계셨단 말이에요?
엘더 :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차피 다들 믿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자신의 수명을 넘어서는 500년 뒤의 미래를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아했던 것도 있었고, 제 말이 외부에 전달되었다 해도 독 속성 마법사인 저를 그저 무시하거나 제정신 아닌 사람으로 취급했을 겁니다. 게다가 마법사들 사이에선 제 아내와 같은 예언자들은 그저 세상에 저주를 뿌리고 다니는 불결한 존재들일 뿐이었으니, 더더욱 신뢰하지 않으려 했을 겁니다.
페레그린 : 그런… (지난 일을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듯) 그래서 제게 독성의 중화에 관한 연구의 도움을 요청하셨을 때, 어떻게든 당신이 앞으로 120년간은 반드시 살아있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던 건가요?
엘더 : (페레그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눈을 지그시 감으며) ...저는 제가 모욕을 당하는 건 견딜 수 있어도, 제 가족과 친구들이 모욕받는 일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책임을 온전히 저 혼자 짊어지겠다고 결심했고, 결국에는 원치 않아도 배신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만... (작게 한숨을 내쉬곤) 동족을 배신한다는 게 저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만큼이나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던지.
페레그린 : (어안이 벙벙한 듯) 세상에나…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전혀 몰랐어요.
엘더 : (씁쓸한 얼굴로) …그러다 보니, 결국 림을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듭니다. 지금까지도 뼈에 새겨진 듯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던 그 강한 진파와 함께, 섬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던 기억은 여전히 절 괴롭히고 있습니다. (테라스 너머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검푸른 밤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특히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저 수평선 너머를 바라볼 때마다 제 양심이 무겁게 짓눌려지곤 합니다. 제 삶의 마지막 이정표가 그렇게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영원히 사라져버렸고, 어차피 미래는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면, 동족을 배신한 것에 의미가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
페레그린, 엘더의 말을 듣곤 그를 위로해주려는 듯 잠시 가만히 서서 테라스 너머의 바다를 바라본다.
페레그린 : (공감하듯) …많이 힘드셨겠어요. 워커 씨도 어느 정도는 우리 같은 독 속성 마법사를 이해하고 있었을 거고, 그걸 알면서도 목숨까지 걸면서 배신을 선택하셨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와버렸으니까요.
엘더 : (말없이 가만히 페레그린의 말을 들으며) …
페레그린 : …하지만, 워커 씨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하셨는 걸요.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 해도, 이전에 대마법사씩이나 되셨던 수장님을 그렇게 손쉽게 제압하시게 될 줄은 저도 상상조차 못했단 말이죠! (격려하듯) 그리고 그런 만큼, 사모님께서도 워커 씨에게 감사하고 이해해 주셨을 거예요.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걸면서 어떻게든 림을 지켜내려 했던 노력은 변함없는 사실이었으니까요.
엘더 : (지난 로블의 망자의 숲으로 이어지는 바닷가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곤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렇게라도 말씀해주시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군요.
페레그린 : (한 손을 엘더의 어깨 위로 올리곤 그를 바라보며) 그리고, 이제 워커 씨는 더는 혼자가 아닌 걸요? 저 또한 지난 내전에서도 당신을 도와 함께 싸우고 있었고, 오랜 동료로서 필요할 때 언제든 도움을 드릴 수 있으니까요. (미소지으며) 앞으로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어 세울 기회는 여전히 많을 거예요, 워커 씨는 강한 사람이니까요.
엘더, 페레그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와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평화롭게 침묵에 빠진다. 그러던 와중 그는 이전보다도 졸음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듯 재차 늘어지게 하품을 내뱉는다.
엘더 : (하품을 하곤 졸린 눈을 비비며) …젠장, 이렇게 또다시 너무 많은 걸 내뱉어버린 것 같은데…
페레그린 : (웃으며) …후후, 괜찮아요. 덕분에 동료로서 워커 씨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걸요. 밤도 늦었고 하니, 저희도 이만 푹 쉬는 게 좋겠어요.
엘더 : (저택 안으로 돌아가려 하듯 몸을 뒤로 돌린 채)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실험 작업이 시작될 겁니다, 그때까지 당신도 충분히 쉬어 두십시오.
페레그린 : (엘더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물론이죠. 해 뜨면 다시 보자구요!
엘더, 페레그린을 뒤로하고 저택 안으로 향하는 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문앞에 다다랐을 때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페레그린이 있는 쪽을 향해 살짝 돌린 채 입을 연다.
엘더 : (진중한 목소리로) …페레그린.
페레그린 : (엘더가 자신을 이름으로만 부른 것에 놀라며) !
엘더 : 오늘… 이렇게 오랫동안 제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때 림에서 절 기꺼이 도와주셨던 것도.
페레그린 : 아… (쑥스러운 듯 웃으며)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걸요. 저희가 그저 사무적인 관계일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서로 친구로서 도울 수 없는 건 아니니까요.
엘더 : … (대답 없이 다시 가려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페레그린 : (정중하게 인사하며) 안녕히 주무세요, 워커 씨.
엘더, 다시 걸음을 옮기며 저택 안으로 모습을 감춘다. 페레그린, 테라스를 떠나는 엘더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아무리 사무적인 관계라 할지라도, 엘더가 자신에게 더 개방적이고 솔직해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편안함과 신뢰를 느낀다는 것에 감사한 듯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장면이 마무리된다.
조명 페이드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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