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im & Roe/프롤로그

Prologue 2. / Snow-Dropped

RiELL 2023. 4. 9.

(BGM)

 

 

목차

     

    <제 1막>

    #01 500년 전의 어느 늦은 낮, 사리타의 어두침침한 술집 안

    서서히 조명 페이드 인,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오후의 술집 안의 정경이 나타난다. 실내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앉아있고, 작게 흘러나오는 음악만이 그 적막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띄울 뿐이다. 그 사이에서 한구석에 있는 테이블 앞에 흑갈색 제복 코트를 어깨에 걸친 채 쓸쓸히 앉아있는, 중년 이상으로 보이는 보라색 머리칼을 한 과거의 엘더에게 스포트라이트.

    엘더 : ... (침울한 얼굴로 힘없이 술잔의 술을 비워낸다.)

    엘더의 테이블에는 술병과 술잔, 그리고 '엘더에게'라고 적혀있는 연보라색 편지봉투와 마지막 끄트머리에 '너의 영원한 사랑, 위즈'라고 적힌 편지지가 놓여 있다.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비워내던 와중 엘더, 한숨을 푹 내쉬며 홀로 중얼거린다.

    엘더 : (탄식 섞인 목소리로)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머리를 싸매 쥐며) ...위즈...

    엘더, 머리를 싸매 쥔 채 한참 동안 끙끙 앓는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술집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눈처럼 새하얀 짧은 머리카락에, 언제나 따뜻한 기온을 유지하는 림의 날씨에 맞지 않게 털옷을 꽁꽁 싸맨 것을 보니 영락없는 남성 순혈 얼음 속성 마법사이다. 얼음 마법사에게 또 다른 스포트라이트.

    얼음 마법사 : (밝은 표정과 큰 목소리로 술집 내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여어, 다들 좋은 하루예요!

    엘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 출입문 쪽을 바라본다. 음울했던 술집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 얼음 마법사의 활기찬 인사에 술집 안의 손님들이 맞인사를 해 준다. 그와 동시에 전체적으로 조명이 조금씩 밝아지며 침울했던 분위기가 약간 풀린 듯한 느낌을 연출한다. 얼음 마법사, 술집 안의 사람들과 한 명씩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으며 그들과 어우러진다. 엘더, 갑작스러운 상황에 신경이 잠시 다른 곳으로 흘렀지만 다시 힘없이 우울한 표정으로 술을 들이켠다.
    얼음 마법사, 한동안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홀로 앉아있는 엘더를 발견하고선 씨익 웃곤 능청스럽게 슬금슬금 그의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건다.

    얼음 마법사 : (뻔뻔스럽게 엘더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반가워요~!
    엘더 : ...?! (놀라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편지봉투와 편지지를 급히 한 손으로 접어 제복 안쪽 주머니에 재빠르게 쑤셔 넣는다.) 으, 으음…
    얼음 마법사 : 이 주변에선 처음 보는 분이시네요! 옆에서 같이 마셔도 될까요?
    엘더 : … (초면인 상대가 갑작스럽게 친밀한 태도로 다가와 당황스럽지만, 쓸쓸한 기분에 거절하지 못하며 시선을 그에게서 돌린 채) ...마음대로.

    엘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음 마법사, 경쾌하게 그의 옆에 앉으며 밝은 목소리로 술집의 주인에게 술과 안주를 주문한다.

    얼음 마법사 : (술집 주인이 내어 준 술을 받으며) 정말이지, 오늘따라 하늘이 많이 흐리네요. 술 한잔하기 딱 좋은 날이야!

    얼음 마법사, 술을 잔에 따라 벌컥벌컥 들이켠다. 옆에서 얼음 마법사가 분위기를 띄우고는 있지만, 엘더는 여전히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말없이 술잔에 든 술을 내려다보기만 한다.

    얼음 마법사 : (능청스럽게 엘더에게 말을 걸며) 그쪽은 여기 처음인가요? 저 여기 단골인데 그쪽은 처음 보는 걸요~
    엘더 : ...? (한참 생각에 빠져있다가 옆의 얼음 마법사가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곤 고개를 든다.) 아, 아…

    엘더, 금방 다시 우울한 얼굴을 한 채 멍하니 술잔을 바라본다. 얼음 마법사,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다가 슬쩍 엘더의 상태를 살피고선 뭔가 심상찮음을 눈치챈 듯 말을 건다.

    얼음 마법사 : (술을 마시다 엘더를 슬쩍 쳐다보며) 무슨 일 있어요? 저야 술 좋아해서 낮에 마시는 거지만, 그쪽은 음... 사정이 있어 보이는 것 같은데.
    엘더 : (힘없이 한숨만 푹 내쉬며 시선을 피한 채) ...별일 없습니다.
    얼음 마법사 : 흐응~ 진짜요? (빤히 바라보며)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요? 별일이 없으면 나오지 않을 얼굴이라고요.

    엘더, 초면에 자꾸 말을 걸어대는 얼음 마법사가 약간 거슬리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대꾸하지 않은 채 술잔에 술을 가득 담아 단숨에 전부 마셔버린다.

    얼음 마법사 : 흐음. (엘더를 슬쩍 바라보며) 그래도 저, 이 동네에서 제일가는 상담사로 유명하다고요~? (씨익 웃으며) 제가 고민 상담이라도 해 드릴까요?
    엘더 : (날선 눈초리로 얼음 마법사를 노려보며 딱 잘라 거절한다.) ...초면에 서로 이야기할 문제는 아닐 텐데 말입니다.
    얼음 마법사 : 흐음~... (엘더의 날 선 반응에도 겁먹지 않은 듯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술잔을 잡으며) 그럼 뭐, 같이 건배라도 할래요?
    엘더 : ...? (얼음 마법사를 흘깃 바라보며) ...갑자기 무슨-...
    얼음 마법사 : 건배는 언제나 즐거운 법이죠! 그래도 술은 즐겁게 마셔야 하지 않겠어요? (술잔을 들며 엘더를 향해 웃어 보인다.) 우리 건배해요, 건배~

    엘더, 한없이 밝은 분위기를 띠는 얼음 마법사를 못 이기겠다는 듯 대충 술잔을 들어 말없이 그의 술잔에 살짝 부딪친다. 그 순간 조명이 꺼지고,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며 둘의 그림자 실루엣만 보인 채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는 듯한 소리와, 가끔가다 웃음소리도 함께 들리는 듯하다. 그렇게 취기 오른 듯한 대화가 한동안 오가다가 다시 조명 페이드 인, 주변에 널려 있는 술병과 함께 잔뜩 술에 취한 채 늘어진 자세로 앉아있는 엘더와 얼음 마법사의 모습이 나타난다.

    엘더 : (고민을 토로하듯 취기에 늘어지는 말투로) …그렇게 겨우 풀린 제 여생은 아내와 행복하게 보낼 줄 알았는데…
    얼음 마법사 : (취해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얼굴만 환하게 웃는 채로 고개만 끄덕인다.) 흐응~
    엘더 : (눈물을 글썽거리며) 언젠간 일어날 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결국 제 아내는 갑작스럽게 떠나가버리는 바람에…
    쿼너 : (엘더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그저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으으음~...
    엘더 : (살짝 울음이 섞인 듯한 떨리는 목소리로) 그래서... 아내의 마지막 소원이라도 들어주자고 결심했건만…
    얼음 마법사 : (아무런 생각 없이 대충 반응하며 술을 홀짝인다.) 으응~...
    엘더 : …그러려면 앞으로 500년의 세월을 버텨내야만 하는데... (훌쩍이며) 그동안 저 혼자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얼음 마법사 : 으으응~ (여전히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 가만히 웃기만 하고 있다.)
    엘더 : (급기야 울기 시작하며) 너무나도 막막하고... 저에게는 너무도 버거운 운명인 것을…

    얼음 마법사, 엘더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은 채 그를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준다. 엘더, 그동안의 설움이 터진 듯 체면도 잃고 얼음 마법사를 껴안고 통곡한다. 술집 점원이 두 취객을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젓곤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한참 동안 우습고도 슬픈 상황이 연출되다가, 이후 얼음 마법사가 울다 지쳐 쓰러져 잠든 엘더를 끌고 플로로 향하는 포탈로 이동하는 듯한 실루엣만이 보이며 조명 페이드 아웃.

     


    #02 다음 날 아침, 플로 섬의 어느 얼음 동굴 안

    조명이 서서히 밝아오며, 얼음 동굴 저 끝 너머에서부터 쏟아지는 햇빛이 얼음 벽면을 비춰 반짝반짝 빛이 나는 고요하고 청량한 푸른 배경이 나타난다. 동굴 안에는 사람이 사는 듯 얼음으로 만들어진 테이블과 의자 같은 가구, 그리고 털옷들이 걸려있는 옷걸이가 세워져 있고, 밖으로 나가는 쪽에는 생필품들이 담긴 상자들이 실린 눈썰매가 있다. 얼음 동굴의 한구석에 쓰러져있는 엘더에게 스포트라이트.

    엘더 : (잔뜩 인상 쓴 채로 겨우 눈을 뜬다.) ...으....

    엘더, 무거운 몸을 겨우 가누며 비틀거리듯 천천히 상체를 세워 앉지만, 밀려오는 숙취로 심한 현기증이 느껴지는 듯 몸을 급격히 앞으로 숙인다.

    엘더 : (두통으로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신음한다.) 크윽-...
    얼음 마법사 : (언제부터 있었는지 엘더 앞에 앉아있다. 미소 지은 채 그를 바라보며) 일어났어요?
    엘더 : ...?! (어느샌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얼음 마법사에게 깜짝 놀라 뒤로 급히 물러나다 사레가 들린 듯 연신 기침한다.) 커헉...
    얼음 마법사 : (당황하며) 앗, 미, 미안해요! 놀라게 하려고 하는 건 아니었는데. (물이 담긴 투명한 컵을 내어주며) 이거 마셔요.

    엘더, 얼음 마법사가 내어 준 물을 받아 급하게 들이켠다. 물이 너무나도 차가운 나머지 잠시 머리가 깨질 듯 얼어붙어 절로 앓는 소리가 튀어나오지만, 이상하게도 점차 아까보다 두통이 완화되며 진정이 되는 듯 숨을 고른 뒤 주변을 돌아본다.

    엘더 : (갑작스레 엄습해오는 추위에 몸을 움츠린 채 떨며) ...여긴...?
    얼음 마법사 : 아, 여긴 플로예요. (허리에 양 손을 올리며) 쓰러져계신 거 그쪽 집도 모르는데 그대로 두고 떠날 수는 없잖아요?

    엘더, 이내 감기에 걸린 듯한 기분에 잔뜩 웅크린 몸을 떨며 힘없이 기침을 해댄다.

    얼음 마법사 : (잔뜩 웅크린 채 몸을 떠는 엘더를 보곤 그제야 갑자기 떠오른 듯) 아아, 맞다. 그쪽은 독 속성이셨죠... (미안한 듯 머쓱하게 웃으며 얼음 옷장에서 두꺼운 털이불을 꺼내 엘더에게 둘러준다.) 아무래도 제가 얼음 속성이다 보니[각주:1], 이런 문제에 너무 둔감했네요.
    엘더 : (얼음 마법사가 내어 준 털이불을 잔뜩 여민 채 부들거리며 빨개진 코를 훌쩍인다.) ...으음... (면목없다는 듯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저... 실례가 되어버렸군요.
    얼음 마법사 : (여유 있게 웃으며) 괜찮아요, 어차피 전 여기 혼자 사니까요. 실례라 할 건 없으니까 푹 쉬다 가세요!
    엘더 : 으읏... 그래도-...

    엘더, 급하게 일어서려 하지만 아직 가시지 않은 숙취로 무거워진 몸이 휘청거려 그대로 쓰러질 뻔한다. 그 순간 쿼너가 엘더의 팔을 잡아준다.

    얼음 마법사 : (걱정된다는 듯) 바쁜 일 없으시면 쉬다 가시라니까요? 어제 꽤 많이 마시던데, 이 상태로는 어디 가다 쓰러져버린다고요~.

    엘더, 얼음 마법사의 말에 부정할 수 없는 듯 다시 힘없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러곤 또다시 어제처럼 표정이 우울해지며, 그 모습을 바라본 쿼너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얼음 마법사 : (정말 걱정된다는 듯) 진짜 무슨 일 있어요...? 어제도 그런 표정 지으시더니.
    엘더 : …? (얼음 마법사의 말에 약간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든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마음의 소리로) ...분명 어제 술김에 전부 말해버렸던 것 같은데, 기억을 못 하는 건가…? (다시 고개를 떨군 채 우울한 얼굴로 힘없이) ...정말 별일 없었습니다만.
    얼음 마법사 : (고개를 갸웃하며)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요~.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거예요?

    엘더, 잠시 대답을 망설이듯 뜸을 들이다가 시선을 피한 채 말없이 겨우 고개를 끄덕인다.

    얼음 마법사 : (아까보다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런 거라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그렇거든요… (잠시 쓸쓸한 미소를 짓다가 다시 밝은 모습으로) 음... 상태가 괜찮아질 때까지 충분히 여기 있어도 되니까, 무리만 하지 마세요.

    엘더, 고맙다는 듯 얼음 마법사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쿼너 :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를 안 했네요. (머리를 긁적이며) 쿼너라고 해요.
    엘더 : 음… (잠시 고민하듯 뜸을 들이다가) ...엘더... 워커입니다.
    쿼너 : 엘더, 엘더라… 고풍스러운 이름이네요! (히죽 웃으며) 마치 고급 융단 같은 느낌?
    엘더 : (수줍은 듯 시선을 피하며) ...그, 그게 무슨...
    쿼너 : 뭐, 아무렴 어때요. 이따가 같이 아침이나 먹자구요, 아침엔 힘을 내야죠!
    엘더 : (당황하며) 아, 아니, 그… 전 괜찮습니다만-

    그 순간, 눈치 없이 엘더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크게 요동친다. 지난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술만 계속해서 들이켜댔던 기억이 그제야 떠오르면서, 공복과 함께 의기소침해진 엘더는 힘없이 몸을 움츠린다.

    쿼너 : (엘더가 공복이라는 것을 눈치챈 듯 웃으며) 속도 좀 달랠 겸 뭐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당당한 목소리로) 제가 제일 잘하는! 요거트 크림 샌드위치를 해드릴게요.
    엘더 : …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며) …정 그러시다면…

    쿼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얼음 동굴 밖으로 나가보려는 듯 등을 돌린다.

    쿼너 : (엘더를 향해 돌아보며) 그럼 전 아침 준비를 하고 있을게요, 여기서 충분히 쉬었다가 괜찮아지시면 그때 천천히 밖으로 나오세요!

    쿼너,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 햇살이 비치는 얼음동굴 밖으로 걸어나간다. 엘더, 동굴 안 구석에 웅크린 채 쿼너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자신의 이런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듯 축 처진 채 힘없이 한숨을 내뱉는다.

    엘더 :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침울한 목소리로)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엘더, 한동안 그 자세로 가만히 있다가 문득 방금 마셨던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들었던 컵을 바라본다. 잠시 그 컵을 바라보다가 한 손으로 들어보니, 미끄럽고 묵직한 느낌이 드는 것이 유리가 아닌 틀림없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엘더 : (가늘게 뜬 눈으로 얼음으로 된 컵을 살피며) …분명 그 물을 마시고 금방 머리가 나아졌던 것 같은데…[각주:2] (겉제복 안쪽에 있는 빈 실린더를 꺼내곤 바라보며 약간 아쉬운 듯한 기색으로) …조금은 남겨둘 걸 그랬군.

    그렇게 잠시 빈 실린더를 바라보다, 또다시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려댄다.

     

    엘더 : 으윽-... (힘없이 축 처진 채 주린 배를 움켜쥐며) ...이래저래 상태가 말이 아니군...

     

    엘더, 계속 이 상태로 남아있을 순 없다는 듯 실린더를 다시 겉제복 안으로 밀어넣은 뒤 얼음 컵을 내려놓고 쿼너가 덮어준 털이불을 여민 채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순간 동굴 안 빙판 바닥 위에서 미끄러질 뻔하지만, 겨우 자세를 바로잡곤 놀란 가슴을 겨우 가라앉히곤 두 손으로 동굴의 벽을 짚어가며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햇빛이 비치는 동굴 바깥쪽으로 향한다. 출구에 가까워지며 강하게 내리쬐는 동틀 녘의 아침 햇살이 눈을 찔러대자, 한 손으로 햇빛을 가린 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엘더의 뒷모습이 보이며 조명 페이드 아웃.

     


    #03 플로 섬 얼음 산 꼭대기의 얼음 절벽

    조명이 다시 켜지며 가까스로 얼음 동굴 안에서 빠져나온 엘더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의 눈앞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설강화 꽃으로 가득한 눈밭과 함께, 얼음 절벽 너머로 아름다운 설경이 펼쳐져 있다.

     

    엘더 : ! (놀란 얼굴로 가만히 플로의 절경을 바라보며) …이곳은 대체…

    절경의 압도감에 잠시 멍해지는 기분으로 눈의 풍경을 계속해서 감상하던 와중, 짐이 담긴 보따리를 맨 쿼너가 엘더에게 살금살금 다가간다.

    쿼너 : (놀래키듯 뒤에서 대뜸 부르며) 엘더!
    엘더 : 허엇…! (깜짝 놀란 듯 뒤로 주춤한다. 틈을 찔린 듯 당황한 기색으로) 뭐, 뭡니까, 갑자기.
    쿼너 : 아하하! (성공했다는 듯 웃으며) 엘더는 되게 잘 놀라시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쿼너, 따라오라는 듯 뒤쪽으로 엘더를 슬쩍 바라보다가 아래쪽 산길로 내려간다. 엘더,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어쩔 수 없겠다는 듯 쿼너를 따라 길을 내려간다. 그렇게 설산의 풍경을 곁에 두고 산길을 내려가자, 그곳에는 서리과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과수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엘더 : (이런 곳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한 듯 약간 놀란 기색으로 서리과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이것들은-...
    쿼너 : 아, 제가 기르는 서리과 나무들이에요. 꽤 넓지요?
    엘더 : (쿼너를 바라보며) 이걸 전부… 혼자서 관리하시는 겁니까?
    쿼너 :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암, 물론이죠! 어차피 제게 할 일이란 이런 것밖에 없는걸요, 어쩌면 제가 이 세계에서 서리과를 생산하는 지분이 나름 꽤 될지도?

    쿼너, 서리과들의 상태를 살피듯 잠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본다.

    쿼너 : 다들 서리과는 림에서 나는 것만 먹어서 잘 모르는 것 같지만, 그 어떤 곳에서 난 것보다도 이렇게 얼음과 눈이 가득한 플로에서 직접 따서 먹는 게 제일이죠! (가지에 달린 서리과 하나를 따서 엘더에게 내밀며) 하나 먹어 볼래요?

    엘더, 날도 이미 충분히 추운데다[각주:3] 그다지 서리과를 좋아하지는 않는 듯 잠시 머뭇거리지만, 쿼너의 성의를 보아서 그가 내민 서리과를 받아 껍질을 깐 뒤 입에 넣는다. 하지만 그동안 림에서 맛보았던 서리과들에 비해 생각보다 맛이 괜찮은 듯 눈이 살짝 커진다.

    쿼너 :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엘더를 바라보며) 어때요? 생각보다 괜찮죠?
    엘더 :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히… 서리과 특유의 미묘하게 씁쓸한 맛이 덜하군요. 단단하기도 좀 더 좋달까…

    쿼너, 엘더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곤 배시시 웃으며 몇 걸음 앞서 걷다 한 손으로 왼쪽을 향해 가리킨다.

    쿼너 : (고개를 엘더 쪽으로 돌리며) 여기에요, 제가 과수원 일을 하다 자주 쉬던 곳!

    쿼너를 따라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자, 그곳에는 플로의 아름다운 설경이 잘 보이는 작은 정자,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다. 쿼너, 정자 안의 의자에 앉아 플로의 풍경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쿼너 : 예전에는 이모님이랑 같이 과수원을 가꾸고, 여기서 같이 점심을 먹기도 했었거든요. 저 혼자 일하게 된 이후부턴 잘 쓰이지 않게 되었지만… (엘더를 바라보며)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여길 소개해주고 싶었는데, 덕분에 소망이 이뤄진 것 같네요~.

    쿼너, 자신의 맞은편에 앉으라는 듯 엘더를 향해 손짓한다. 엘더, 약간 어색한 듯 쿼너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털이불을 잔뜩 여민 채 정자 너머로 보이는 플로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본다.

    쿼너 : (일사불란하게 아침 준비를 하는 듯 보따리의 짐을 풀고 손으로 얼음 마법을 부리기 시작하며) 풍경이 참 보기 좋죠? 자리 하나는 정말 잘 잡은 것 같다니까요!
    엘더 : (여전히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지도.
    쿼너 : (정자 주변의 나무에서 자란 서리과를 따선 자신의 얼음 마법과 융합하여 순식간에 요거트 크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보따리 안에 들어있던 얇게 자른 빵을 꺼내 마법으로 만들어낸 얼음 칼로 그 위에 바르며) 열심히 일하다가 여기 와서 잠깐 풍경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피로가 싹 풀린다니까요? 저만 알고 있던 명소에서 누군가와 같이 먹는 끼니만큼 기분 좋은 게 없단 말이죠~.

    엘더, 그의 말에 대충 대답하려다 삽시간에 요거트 샌드위치 여러 개를 완성한 쿼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살짝 놀란다.

    엘더 : (쿼너의 앞에 쌓인 샌드위치들을 바라보며 놀란 기색으로) 대, 대체 어느 틈에…
    쿼너 : 자, 다 됐어요! 부드럽고 새콤한 요거트 크림 샌드위치예요.

    쿼너, 보따리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컵 두 개와 물병을 꺼내 하나에는 차가운 물을 따르고, 다른 하나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을 따라서 엘더에게 내어준다.

    쿼너 : (샌드위치를 얼음으로 만든 접시 위에 담아서 엘더에게 내어주며) 지난밤에 꽤 추우셨을 텐데, 이거랑 같이 마시면서 드세요. 이런 김이 나는 물은 구하기 꽤 힘들었다구요?

    엘더, 쿼너가 내어준 것들을 잠시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그제야 얼음장같이 얼어붙었던 몸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 긴장이 풀린 듯한 한숨을 내쉰다.

    쿼너 : (농담하듯) 엘더니까 이렇게 나무로 된 컵으로 가져온 거예요, 아니었다면 그냥 얼음으로 만든 컵을 내줬을 거라고요! 아, 이미 한번 내줬던가?

    쿼너, 엘더를 놀리듯 킥킥 웃으며 샌드위치를 들고 크게 한입 베어 문다. 엘더, 쿼너의 농담에 잠시 그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자신의 앞에 놓인 샌드위치를 조심스럽게 들어 작게 한입 베어 문다. 고소한 빵 사이에 달콤하고 상큼한 서리과의 맛이 깃든 부드럽고 담백한 크림이 혀를 감돌자, 그의 굶주린 위장이 방금 맛본 것을 당장 더 내놓으라고 갈구한 듯 정신없이 급히 한 입 더 샌드위치를 베어 문다.

    쿼너 : (약간 놀란 눈치로 엘더를 바라보며) 어지간히 배고프셨나 보네요…? 뭐, 어제 낮부터 그렇게 계속 술만 마셔대셨으니 말이에요, 안주도 따로 드시지도 않고.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고 우물거리며) 그러면 몸이 쉽게 상한다구요.
    엘더 : (민망한 듯 쿼너의 시선을 피하며) …뭐어, 으음…
    쿼너 : 다음에 거기 다시 가실 일 있으면, 그때는 컵케이크라도 같이 주문해서 마시세요, 거긴 컵케이크도 꽤 맛있거든요. 그중에선 서리과나 러브애플, 선셋피치 파이도 있고…

    그렇게 한동안 그 자리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는 두 사람. 이후 장면이 넘어가며 얼음 접시 위에 잔뜩 쌓여있던 샌드위치가 전부 사라져 있다.

    쿼너 : ...그래서, 어떻게 잘 드셨나요?
    엘더 : (겨우 살겠다는 듯 숨을 내쉬곤 배를 쓸어내린 뒤 고개를 끄덕이며) …덕분에…
    쿼너 :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웃으며) 그렇게 급하게 먹다 체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엘더, 머쓱한 듯 작게 헛기침한다. 쿼너, 탁자 위의 얼음 접시들을 치우곤 마법으로 분해해버린다.

     

    쿼너 : (손을 털며)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여기 좀 더 있다 가실 건가요?

    엘더 : ...으음...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어쨌든, 저도 돌아가긴 해야 하겠지만...

    쿼너 : 뭐어, 딱히 다른 볼일이 없다면 여기서 경치를 더 구경하고 가셔도 좋고요. (턱을 괴며 플로의 경치를 바라보며) 여기는 과일만 훔쳐가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니까요~.

     

    엘더, 쿼너를 따라 플로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어차피 지금 돌아가봤자 또다시 홀로 남겨질 것을 생각하곤 어쩔 수 없겠다는 듯 말을 잇는다.

     

    엘더 : ...그럼... 여기서 조금 쉬었다가, 저도 이만 돌아가는 걸로...

    쿼너 : 그래요, 편한대로 하세요. (짐을 다시 보따리에 싸며) 그나저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혹시 앞으로 술 마실 일 있으면, 저번에 만났던 거기서 다시 만나는 건 어때요?
    엘더 : …? (쿼너를 슬쩍 바라보며) 그, 그건 왜…
    쿼너 : 저 술 좋아해서 거기 자주 있거든요~. 특히 사람 없는 낮에 한잔하고 싶을 때 엘더가 있어준다면 덜 외로울 것 같은데, 겸사겸사 같이 마시면 더 좋지 않겠어요?
    엘더 : (어느정도 뜸을 들이다가 대충 얼버무리듯 대답한다.) ...갈일이 생긴다면야, 뭐…
    쿼너 : (웃으며) 좋아요, 앞으로 저희 자주 볼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엘더, 어쩐지 초면인 데다 독 속성인데도 살갑게 대해주는 쿼너에 태도에 약간 마음이 누그러진 듯 무의식적으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로 둘의 대화가 마무리되며 조명 페이드 아웃.

     


    #04 2주 뒤 늦은 오후, 워커 가 저택 엘더의 개인 휴게실

    서서히 조명이 밝아오며 나타나는 불이 켜지지 않은 방 안에는 적막하고 쓸쓸한 분위기만이 감돈다. 엘더, 겉제복을 벗은 채 구석진 곳의 침대 위에 누워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다.

    엘더 : (외로움에 허탈한 듯 헛웃음이 나온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엘더, 아직도 홀로 남은 것에 익숙해지지 않은 듯 힘없이 한숨을 내쉬곤 옆으로 돌아누워 웅크린 채 눈을 감는다. 잠시 그렇게 가만히 그 자세로 있다가, 문득 지난날에 만났던 얼음 마법사가 한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 듯 슬며시 눈을 뜬다.

     

    쿼너 : (대사를 회상하듯 울리는 목소리로) 혹시 앞으로 술 마실 일 있으면, 저번에 만났던 거기서 다시 만나는 건 어때요?

    엘더 : (작게 중얼거리며) …그곳에 다시 한번 가 볼까…

    엘더, 천천히 상체를 세워 침대 위에 앉은 채 잠시 창밖을 바라본다. 그렇게 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하려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탄한다.

    엘더 : …계속 이렇게 혼자 가만히 있어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

    엘더,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겉 제복을 챙겨입곤 방 밖을 나선다. 그리고 조명이 암전되었다 다시 켜지며, 가장 첫 장면에서 보았던 한산한 거리의 술집 앞으로 배경이 이동된다. 그 술집을 향해 길을 걷는 엘더에게 스포트라이트.

    엘더 : (작게 한숨지으며) …여길 다시 오게 되다니.

    엘더, 잠시 술집 앞에 가만히 선 채 간판을 바라보며 망설이다가 마음을 어느 정도 부여잡고 술집 안으로 들어선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바텐더 외엔 아무도 없는 술집 안의 점원이 엘더를 향해 또 무슨 주정을 부리러 왔느냐는 듯한 시선을 보내며 미묘하게 싸늘한 분위기가 감돈다.

    엘더 : (주변을 둘러보지만 자신 외엔 손님이 아무도 없어 괜한 기대를 했다는 듯 이내 피식 웃곤 고개를 젓는다.) …역시 단순한 빈말이었겠지…

    엘더, 어색함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지난번과 똑같은 자리에 앉아 선셋피치 칵테일을 주문한다. 그리고 잔에 조금씩 술을 따라 마시면서 홀로 시간을 보내던 와중, 지난번에 만났던 얼음 마법사가 창밖에서 슬쩍 술집 안을 들여다보더니 엘더를 발견하곤 씨익 웃으며 힘차게 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쿼너 : 엘더! (한구석에 앉아 있는 엘더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다.) 다시 와주셨네요!
    엘더 : …아. (막상 정말로 쿼너에게 발견되니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시선을 피한 채 살짝 얼굴을 붉힌다.) 으, 으음…

    쿼너, 자연스럽게 엘더의 옆자리에 앉곤 지난번과 같은 술을 주문한다. 술집 주인, 두 명이나 나타난 지난날의 주정뱅이들을 향해 미심쩍고 불안한 눈빛으로 흘깃 바라보다 쿼너에게 술을 내어준다.

    쿼너 : 정말이지, 오늘은 하늘이 맑고 화창하네요~ 술 한잔하기 딱 좋은 날이야!

    쿼너, 지난번과 똑같이 잔에 술을 따라 벌컥벌컥 마신다. 엘더, 어쩐지 한결같은 사람이라 생각된 듯 쿼너를 슬쩍 바라보다가 자신도 술잔에 술을 따른다.

    쿼너 : 저번엔 정말 지나가는 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정말로 다시 와주실 줄은 몰랐는걸요? (능청스럽게 씨익 웃으며) 혹시 저 보고 싶어서 오신 거예요?
    엘더 : 뭣-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당황하며) …그, 그럴 리가.
    쿼너 : (장난스럽게 엘더를 빤히 바라본다.) 흐응~ 정말로요? 딱히 제가 신경 쓰여서가 아니라 정말 순전히 우연으로?
    엘더 : 다, 단순한 우연일 뿐입니다. (민망한 듯 헛기침하며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정말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쿼너 : 으응? (잘 못 들었다는 듯 엘더에게 가까이 붙으며) 방금 뭐라고 했어요?
    엘더 : (당황한 듯 진땀을 흘리며 두서없이 아무 말이나 튀어나온다.) 그, 그냥 이참에 건배나 할까 하는 말이었습니다. (어색하게 잔을 들어 올리며) 다른 게 아니고…

    쿼너, 엘더의 말을 듣곤 피식 웃으며 술이 든 잔을 들어 함께 건배한다. 두 사람, 동시에 잔에 든 술을 들이켠다.

    쿼너 : (개운한 듯 탄성을 지른다.) 캬~ 역시 술은 혼자 마시는 것보단 다른 사람이랑 함께 마셔야죠!
    엘더 : (조금 전까지 어색했던 모습과는 달리 점차 쿼너의 활기참에 익숙해져 가는지 작게 동조한다.) …확실히…
    쿼너 : 낮에는 술 마시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 혼자라도 마실까 했는데, 엘더가 있어줘서 다행이네요! (호탕하게 웃곤 자신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그래서, 그때 이후로 잘 지냈어요?
    엘더 : 으, 으음-... (대답하기 애매한 듯 망설이다 둘러대듯) …뭐어, 대충…
    쿼너 : (엘더의 얼굴을 바라보곤) 음, 그래도 지난번에 봤었을 때보다는 확실히 괜찮아 보이긴 하네요! (능청스럽게) 저번에는 정말로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한 얼굴이었는데.
    엘더 : 읏- (쿼너의 말에 적잖이 찔린 듯 시선을 피하며) …그, 그 정도였습니까.
    쿼너 : (고개를 끄덕이며) 그날 이후로 잘 돌아갔나 계속 걱정했다고요. 혹시라도 여기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매일 들여다보곤 했는데, 결국 이렇게 다시 볼 수 있게 돼서 좋네요~.

    쿼너,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엘더, 쿼너를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다시 술이 든 잔으로 옮기며 작게 중얼거린다.

    엘더 : (혼잣말하듯) …제가… 걱정됐단 말입니까.
    쿼너 : (술을 들이켜곤) 당연하죠, 그런 얼굴로 다니면 누구든 걱정한다구요.
    엘더 : … (잠시 침묵하다 중얼거리듯) …그런 사람은… 당신이 유일했습니다만.
    쿼너 : 으응? (엘더를 바라보다 머쓱해하며) 그, 그랬던 거예요?

    엘더, 굳이 자신의 입으로 답하기 싫다는 듯 말없이 잔에 든 술을 들이켠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생겨 어색한 분위기가 감돈다.

    쿼너 : 으음… (어색해진 분위기를 만회하려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다) 그럼… 제가 엘더의 말동무라도 되어드릴까요?
    엘더 : (갑작스럽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쿼너의 태도에 당황하며) 가, 갑자기 무슨-…
    쿼너 : 별건 아니고, 그냥 주기적으로 여기서 만나서 대충 같이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다 헤어지는 거죠. 아니면 같이 산책이라도 하거나!
    엘더 : (어색한 듯 시선을 피하며) …구,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제가 당신의 친구인 것도 아니고.
    쿼너 : 뭐어, 관계는 지금부터 천천히 쌓아가면 되는 거죠! (웃으며) 가끔 기분전환도 할 겸 좋을 것 같은데. 굳이 술 마시기가 싫다면, 새로운 곳에 잠깐 놀러 다녀보기도 하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엘더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쿼너, 그를 향해 장난스럽게 빤히 바라보며 씩 웃는다.

    쿼너 : (깍지 낀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엘더를 빤히 바라보며) 그럼, 매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뭐, 사정이 안 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요!

    쿼너, 호탕하게 웃는다. 엘더, 쿼너의 활기찬 기운에 약간 기가 빨리는 듯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몰래 작게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자신을 순수하게 걱정해주고 신경 써주는 듯한 그의 모습에 약간은 위안이 되는 듯, 첫 만남 때보다는 시선에 어느 정도 경계심이 거둬진 듯한 느낌이다.
    조명이 암전되며, 한 주가 흘러 또다시 같은 술집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장면으로 이동되며 조명이 다시 켜진다. 엘더, 저번보다는 익숙한 태도로 쿼너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술을 주문한다.

    쿼너 : (엘더를 바라보며) 이번에도 선셋피치 칵테일이네요, 특별히 좋아하시는 건가요?
    엘더 : (머쓱한 듯) …뭐어, 으음… 아마 그럴지도.
    쿼너 : 음, 그럼…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던 선셋피치 파이도 같이 드셔 보실래요? 제가 한 턱 쏠 테니까요!
    엘더 : (당황하며) 아, 아니,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쿼너, 엘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술집 주인에게 선셋피치 파이와 서리과 타르트를 주문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엘더가 진땀을 흘리던 와중, 금세 둘의 앞에 포크와 함께 맛있어 보이는 과일 파이와 타르트가 고급진 접시 위에 정갈하게 담겨 나온다.

    쿼너 : 갓 구워서 나오는 거라 엄청나게 맛있다구요~. (선셋피치 파이가 담긴 그릇을 엘더 앞에 내어주며) 이번에도 빈속에 술만 들이켜지 마시고요.

    그렇게 쿼너가 엘더를 챙겨주는 장면이 지나가며 이후 어느 날 밤 아무도 없는 거리에 유일하게 빛을 비추는 가로등 아래 벤치에 쿼너와 엘더가 앉아있는 장면으로 이동된다. 그 주변에는 얼음에 갇혀 망가져버린 구식 권총이 떨어져 있다. 엘더, 힘없이 앉은 채 붉어진 눈시울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 쿼너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엘더 : (떨리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음… 갑자기 많이 놀라게 해드린 것 같아서...
    쿼너 : (몸을 웅크려 앉은 채) 아니에요, 누구든 우울해지는 때가 있으니까요.
    엘더 :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심호흡을 하곤 하늘을 바라본다.) …가끔 이럴 때가 있습니다. 이미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 지난 일인데도, 과거의 상처가 다시 떠올라 버틸 수 없이 쓰라릴 때가 있어서… (씁쓸하게 웃으며)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어버리면 될 일인데, 어리석게도…

    쿼너, 그런 엘더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없이 그를 꼭 안아준다.

    쿼너 : (한 손으로 엘더의 등을 토닥여주며) …가끔은 마음껏 울어도 괜찮아요, 그래야 아픔이 사그라지거든요. 참으면 오히려 더 상처가 깊어진다구요.

    엘더, 쿼너의 포옹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에 잠시 놀란다. 하지만 그가 내뿜는 찬 기운이 마치 화상을 입어 쓰라린 마음의 상처를 시원하게 보듬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애써 억누르고 있던 눈물이 점차 솟아오른다. 그리고 이윽고 쿼너를 품에 안은 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엘더 : (눈물을 쏟아내며)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쿼너…!
    쿼너 : (눈가에 눈물이 맺히며) …엘더가 영영 떠나가는 건 싫은 걸요. 제가 살아있는 한, 다시는 그런 선택은 하지 않기로 저랑 약속해요. 알겠죠…?

    그렇게 서로 포옹한 채로 한참을 울음을 토해내는 엘더의 모습이 보이다, 이번에는 저녁노을이 지고 파도가 철썩이는 림의 해안가로 배경이 이동된다. 해안선을 따라 함께 천천히 산책하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엘더와 쿼너에게 스포트라이트.

    쿼너 : (엘더를 바라보며) 엘더는 평소에 뭐 하고 지내세요? 저는 플로에서 과수원을 가꾼 이후에는 사람들 만나러 림이나 로블로 놀러 다니는데.
    엘더 : …으음… (잠시 생각하듯) 그냥, 뭐랄까… 림에 남은 마나의 양을 확인하고, 사회적으로 일어난 현상들을 기록하면서 논문 작성, 문학 작품을 읽은 뒤 평론문을 작성하고, 다양한 속성의 마력과 관련해서 연구하고, 그것에서 도출해낸 사실을 응용해서 실험…
    쿼너 : 세상에… (놀란 듯) 쉬지도 않고 계속 일하시는 거예요? 주말도 따로 없이?
    엘더 : 뭐-뭐어… (머쓱해하며) 이렇게 생활해온 지도 수백 년이 넘었던지라, 아예 몸에 배어버렸다고나 해야 할까…
    쿼너 : (어안이 벙벙한 듯) 그래도 그렇게 계속 일하다간 언젠간 정말로 큰일 나겠는걸요…? 저라면 한 시도 못 버텼을 거라고요!

    엘더, 쿼너의 말에 변명은 못하겠는지 시선을 피한 채 멋쩍게 웃기만 한다. 쿼너, 두 손을 허리에 올린 채 말을 이어간다.

    쿼너 : (결심이 선 듯) 안 되겠다,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엘더를 데리고 밖으로 놀러 다녀야겠어요! 이대로 엘더가 안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면 안 되니까.
    엘더 : (약간 당황한 듯) 아, 저기, 그럴 필요까지는-...
    쿼너 : 너무 집안에만 있는 것도 안 좋다구요~. 이런 식으로 자주 바깥 공기도 좀 마시고 해야죠!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 세계에선 오래 살더라도 볼거리가 생각보다 많은걸요, 같이 돌아다니면서 즐기면 더 재미있을 거예요!

    엘더, 쿼너의 말을 듣곤 잠시 가만히 생각하다 말을 잇는다.

    엘더 : (고개를 들며) …으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다른 곳에 갔다 오는 것도 괜찮을지도…
    쿼너 : 헤헤, 좋아요!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되니까, 다음엔 어디로 가볼지 미리 생각해둬야겠네요~

    그렇게 거리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둘의 모습이 보이다가, 이번에는 번화가 거리의 장면으로 이동되며 벽에 줄지어 붙어 있는 연극 포스터들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엘더와 쿼너에게 스포트라이트.

    쿼너 : (놀라며) 엘더가 유명한 연극배우였다고요?! 세상에, 제가 그동안 연극에 관심이 없었던 게 후회되네요… 아, 지나가다 포스터로 자주 보긴 했는데… 그게 엘더였다고요? (눈을 반짝이며) 역할마다 인상이 엄청나게 많이 바뀌네요! 신기하다…

    또한번 조명이 암전되었다 다시 켜지며, 다음으로 수많은 불꽃이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축제의 밤거리의 장면으로 이동된다. 이제 막 불꽃놀이가 시작된 듯 구경하러 온 수많은 마법사 사이에서 하늘로 날아올라 터지는 폭죽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쿼너에게 스포트라이트.

    쿼너 : (밤하늘을 바라본 채 눈이 반짝이며) 와아… 멋지다…! 엘더, 저길-... (엘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멈칫하며) …응?

    쿼너가 뒤를 돌아본 방향에는 공황 증세가 온 엘더가 뒤쪽 구석 쪽에 주저앉은 채 파랗게 겁에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고르고 있다. 쿼너, 그런 엘더의 상태를 보고 놀라선 걱정이 된 듯 급히 그에게 다가간다.

    쿼너 : (걱정스러운 듯 엘더의 곁에 꿇어앉아 상태를 살피며) 엘더! 괜찮아요?
    엘더 : (밭은 숨을 고르며) …죄, 죄송합니다, 전… (눈을 감고 진정하려 애쓰며) ...불꽃은 정말로 질색인지라.[각주:4]

    쿼너, 잠시 그렇게 가만히 엘더를 바라보다가 심상찮은 느낌이 든 듯 그의 팔을 잡아주며 말을 잇는다.

    쿼너 : 으음, 그럼… 오늘 여기서는 즐길 건 다 즐겼으니까, 근처에 있는 조용한 찻집에서 잠시 쉬었다 갈래요?
    엘더 : …아… (겨우 눈을 떠선 천천히 고개를 들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제가 괜히 당신의 즐거움을 망친 건 아닌지…
    쿼너 :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저에게도 불꽃이라면 어려모로 위험하니까요~. 그리고 이왕이면 엘더랑 함께 즐길 수 있는 걸 찾는 게 더 좋죠!

    쿼너, 엘더를 향해 손을 내민다. 엘더, 쿼너가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운다.

    쿼너 : 그럼 어서 가요, 제가 아주 잘 아는 찻집 하나가 있거든요! 거기서는 파르페를 정말 맛있게 해주는데-...

    그렇게 불꽃놀이가 한참 진행되는 축제 현장을 뒤로하고 엘더와 쿼너가 함께 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후 둘이서 여러 장소에서 만나며 함께하는 장면들에 스포트라이트가 잠깐씩 비쳐 지나간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 무대 왼편의 방에서 엘더, 무언가 고민하듯 한동안 계속해서 방 안을 배회하다 결심이 선 듯 책상에 앉아 깃펜을 들어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한다. 그러던 와중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다 종이를 구겨서 던져버리곤 새로운 종이에 다시 글을 적기 시작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그가 쓴 글의 내용이 엘더의 목소리로 읽히기 시작한다.

    내레이션(엘더) : 쿼너,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다름이 아니라, 그동안 친구로서 당신에게 여러모로 빚진 게 많은 것 같아 간만에 제 저택에서 저녁이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신지. 혹시 좋으시다면 원하는 음식이나 만나기 괜찮은 날짜를 알려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저는 언제든 시간이 있으니 원하는 만큼 느긋하게 푹 쉬었다 가시는 건 어떠신지요.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의 진실한 벗, 엘더 워커.

    편지의 내용이 거의 다 읽힐 즈음 엘더, 겨우 편지의 내용을 완성한 듯 몸을 의자 뒤로 뉘인 채 깊은 숨을 내쉰다. 그러곤 편지를 종이봉투에 넣어 의안 모양 도장으로 인장을 찍어 봉인한 후, 저택 바깥의 우체통에 넣는 것으로 조명이 페이드아웃 되었다가 무대 오른편엔 쿼너가 있는 플로의 얼음절벽으로 장면이 이동된다. 가만히 절벽 끝에 앉아 설경을 바라보던 그때, 한 눈올빼미가 나타나 자신의 발에 들려 있는 엘더의 의안 모양 인장이 찍힌 편지봉투를 쿼너에게 주곤 다시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다. 봉투의 의안 인장을 발견한 쿼너가 놀란 얼굴로 봉투를 뜯어 안의 내용을 확인하자, 기쁜 듯 웃는 모습을 보여주곤 조명 천천히 페이드 아웃.

     


    #05 몇 주 후 늦은 저녁, 워커 가문 저택의 옥상 테라스

     

    조명 페이드 인, 수많은 별들이 수놓은 밤하늘 아래 들리는 풀벌레 울음소리와 함께 테라스의 밝은 조명이 두 사람을 비추며 분위기를 띄운다. 엘더에게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받은 쿼너는 호화스러운 식사를 마친 후 엘더와 함께 워커 가문 저택의 옥상 테라스의 테이블에 앉아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다.

     

    쿼너 : 오늘 이렇게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엘더. 덕분에 간만에 호상을 누리네요, 이것저것 평소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것도 엄청나게 많이 얻어먹고! (자신의 배를 두드리며 장난스럽게) 오늘은 밤새껏 엘더랑 놀아버릴 거니까 각오하세요!

    엘더 : (능청스럽게 웃으며) 뭐, 인제 와서 제가 최대한 해드릴 수 있는 건 이런 것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잠들지 않는 내기라도 건다면 저 또한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만, (잔에 술을 따르며) 쿼너 당신이야말로 단단히 마음먹으셔야 할 겁니다.

     

    두 사람, 즐거운 듯 웃으며 건배하곤 동시에 술을 죽 들이켠다. 둘만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와중 엘더, 차분하게 쿼너에게 말을 건넨다.

     

    엘더 :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부른다.) …으음, 쿼너.

    쿼너 : 으응?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엘더를 바라본다) 왜요, 엘더?

    엘더 : 그, 이제 와선 조금 어색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 당신에게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쿼너 : 음... (살짝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요! 뭐든 물어보세요.

    엘더 : …그럼… (헛기침하곤 잠시 쿼너의 눈치를 보며) ...음, 조금은 오래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처음에 당신이 저와 친구가 되어준 이유가, 따로 있으셨던 건지…?

    쿼너 : 네? (질문의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한 듯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엘더 : 음, 그러니까… (쿼너의 시선을 피하며)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그저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나이 먹은 노인일 뿐이었고, 게다가 심지어 독 속성이었잖습니까. 보통은 쳐다보지도 않을 존재였을 텐데, 그런데도 굳이 저한테 계속해서 다가와 주신 게 좀 의외였달까…

    쿼너 : 으응? (웃음이 나오려는 듯 광대가 씰룩거린다.) 그래서 그게 그렇게 궁금했던 거예요? 하하하!

     

    쿼너, 박장대소한다. 엘더, 쿼너의 반응에 당황한다.

     

    엘더 :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피하며) ...아, 아니, 저는-...

    쿼너 : (괜히 놀리려는 듯 빤히 엘더를 바라보며) 저는 또 엄청난 질문을 하려는 건가 싶었네요!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술주정으로 답할걸!

     

    쿼너, 장난스럽게 놀려대다가 엘더가 꽁한 표정을 짓자 겨우 진정하곤 숨을 돌린다.

     

    쿼너 : (웃어서 생긴 눈물을 닦으며) 후… 미안해요, 이렇게 웃은 건 오랜만이라. (한 번 헛기침한 뒤) …대단한 건 없어요, 그저 엘더가 좋은 사람이고, 곁에 있어줄 누군가가 필요해 보여서일 뿐이죠.

    엘더 : ...하지만, 이미 당신에겐 다른 친구들도 많은 것 같고… 웬만해서는 첫인상부터 독 속성은 위협적으로 여기는 것처럼 그리 좋게 생각하지는 않잖습니까.

     

    쿼너, 엘더의 말에 생각하듯 턱을 괸 채 뜸을 들인다.

     

    쿼너 : 으음… 그런가요. (골똘히 생각하며) …뭐,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사실, 제겐 그렇게 깊게 사귀는 친구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 (엘더의 눈치를 보며) 그게, 음, 독 속성만큼은 아니긴 하지만… (약간 차분해진 얼굴로) …사람들은 얼음 속성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잖아요, 도무지 쓸모를 모르겠다면서요. 게다가 얼음 속성 마법사들은 체질상 기후에 민감해서, 언제나 찬 기온을 유지하는 플로 밖으로는 더더욱 나가려 하지 않죠. 그리고 제가 사는 곳도 사람들이 다니기 어려운 곳이기도 해서, 누군가 저를 보러 찾아오는 경우는 하늘의 별 따기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찾기보다는, 제가 사람을 찾아 나서는 일이 훨씬 많죠.

     

    쿼너,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쿼너 : …잘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저도 은근히 외로움을 느꼈나 봐요. 부모님께선 병으로 돌아가시고, 저를 유일하게 돌봐주셨던 이모님도 돌아가신 이후론 남은 건 저 혼자뿐이었는걸요. (쓴웃음) 그래서 제가 플로에 남지 않고 계속해서 림에 자주 오갔던 거예요, 마력이 계속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감수하면서까지요. 저와 마음이 맞아 누군가와 친해질 수 있다면, 속성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렇게 정처 없이 림을 헤매고 다니면서 저 때문에 주변이 얼어붙고 추워진다며 싫어하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엘더처럼 보석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걸요?

     

    쿼너,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엘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가만히 술잔을 내려다본다.

     

    엘더 : …그래도 얼음 속성은 단순히 말 그대로 얼음일 뿐이지만… 저는 그 어떤 마력조차 파괴해버리는, 말 그대로 매우 위험한 '독' 속성이었잖습니까. (씁쓸한 표정으로) 제가 당신을 충분히 해칠 수도 있었고, 당신에겐 목숨이 달린 일이었을 텐데…

    쿼너 : …뭐어, 물론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턱을 괸 채 엘더를 바라보며) 하지만 봐요, 엘더는 그동안 절 해친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요? 엘더가 제게 딱히 폐를 끼쳤다고 생각되는 일도 없었는걸요!

    엘더 : ...음… (시선을 내리깔며) ...그, 그렇습니까.

    쿼너 : 그리고, 사람은 특별히 쓸모가 있어야만 친해지는 게 아니잖아요, 오히려 쓸모에 집착하다간 서로 이용하게 될 가능성이 크죠. 그건 친구가 아니라 도구가 될 뿐이에요. (미소지으며) 그리고 엘더는… 친구가 되기 충분할 정도로 매력있는 사람이니까요!

    엘더 : (쿼너의 솔직한 칭찬이 어색한 듯 쿼너의 시선을 피한다.) 대, 대체 어디가… 말입니까.

    쿼너 : 봐요, 우리가 처음 만나고 얼마 안 됐을 때까지만 해도 엘더는 멀리서 보더라도 '가까이 오지 마시오'라고 외치는 듯한 강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던걸요, 마치 줄기에 잔뜩 가시를 세운 장미꽃처럼요. 실제로도 엘더에게 다가온 저를 엘더는 밀어내려고 했었죠, (엘더를 흉내 내려는 듯 굳은 자세로 앉아 인상을 쓰며) '초면에 할 이야기는 아니다'라고 하면서.

    엘더 : (부정하긴 어려운 듯) 그, 그건… 뭐어…

    쿼너 : …하지만 엘더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은 걸 알게 되면서, 그 가시는 그저 표면적인 방패일 뿐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철옹성 같던 첫인상과는 달리 엘더는 생각보다 진솔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던 데다, 저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유능하고 엄청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죠. 게다가 과거에는 멋진 연극배우였다는데, '이렇게나 멋진 사람이 있었다니!' 같은 생각이 어떻게 안 들 수가 있겠어요?

    엘더 : (쿼너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안절부절못하며) …그, 그 정도면 됐습니다, 음…

     

    쿼너, 테라스 난간 너머 림의 풍경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쿼너 : …어쨌든, 저는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신경 안 써요. 제 판단을 믿을 뿐이죠. 만약 엘더가 정말로 저를 해쳤더라도, 단순히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하고 흘려보냈을 거예요. 그리고 사실 독 속성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위협적인 마법은 많잖아요, 특히 화염 마법? 얼음 속성인 저하고는 정말 상극일 수밖에요!

     

    쿼너,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젓는다. 엘더, 그런 쿼너의 모습에 동감한다는 듯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쿼너 : …뭐, 제 생각은 그렇다 치고. (잔에 술을 따르며) 전 오히려 엘더가 저를 받아들이신 게 더 신기한 걸요?

    엘더 :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듯 살짝 놀란 기색으로 쿼너를 바라보며) …그, 그렇습니까?

    쿼너 : (고개를 끄덕이며 잔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마시곤) 처음에는 그렇게나 저에게서 벽을 세워대던 사람이… 이렇게나 저랑 가까워졌으니까 말이에요. 지금 이렇게 엘더와 저녁을 함께할 수 있게 된 것도, 단순히 제가 다가간 것뿐만이 아니라 엘더 또한 제게 다가와 주었으니까 가능한 것이었겠죠. 저랑 계속해서 연을 이어가겠다고 생각한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던 건가요?

     

    엘더, 그동안 의식해본 적이 없었다는 듯 얼버무리듯 대답한다.

     

    엘더 : 뭐-뭐어, 그거야… (쿼너의 시선을 피하며)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 제 주정을 받아주신 것도 있고, 하루 정도 당신께 신세를 지기도 했으니…

    쿼너 : 흐응~? (눈을 가늘게 뜨며) 정말로 그게 다예요? 고작 그런 걸로 엘더가 수십 년이나 저와 함께하시지 않을 것 같거든요, 그것도 스스럼없는 관계까지 되면서. 뭔가 더 있으니까 절 이렇게까지 받아들이신 게 아닌가요?

     

    엘더, 쿼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려는 듯 잔에 담긴 술을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인 뒤 천천히 입을 연다.

     

    엘더 : …그렇군요. (쿼너를 바라보며) 쿼너, 혹시... 제가 당신과 처음 만났던 그때, 저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하시는지.

    쿼너 : 으으으음…. (잘 생각나지 않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글쎄요, 꽤 오래전 일이기도 하고, 그 날 저도 술을 꽤 마셨던지라… (엘더를 바라보며) 근데 그건 왜요?

    엘더 : ...사실… (가만히 술잔을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당신과 처음 만났던 그 날은… 저의 아내를 떠나보내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쿼너 : 아… (약간 놀란 듯 엘더를 바라본다.)

    엘더 : (씁쓸하게 웃으며) 그 날은 다른 그 어떤 날보다도 외로움을 참을 수가 없어서, 사람의 소리가 나는 바깥의 술집에서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마치 폭풍우 치는 절벽 끝에 한 손으로 매달려있던 기분이었달까… (쿼너를 바라보며) ...그리고 그 순간, 저의 곁에 찾아와 손을 내밀어 주었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쿼너.

    쿼너 : 아앗. (쑥스러운 듯 웃으며) 그, 그랬던 건가요? 여러모로 엘더에게 다가가길 잘한 것 같네요!

    엘더 : 다만 조금 웃겼던 것은… (작게 웃으며) ...그날 제가 잔뜩 술에 취해선 주정을 부리며 모든 속내를 다 토로해버렸는데도, 당신은 저보다 먼저 취해있었는지 그 다음 날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시더군요.

    쿼너 : 앗!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그-그랬었나요, 제가? 하하…

    엘더 : ...그래도 당신과 대화한 덕분에, 조금은 그 고통을 덜 수 있었습니다. 이후로는 당신이 그날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던 데다, 괜히 당신을 걱정시켜버리는 건 아닐까 해서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는 않았습니다만… 공존을 외치면서도 정작 속성에 따라 타인을 이용하거나 취급이 달라지기 쉬운 요즘 세상에서, 동료들의 호의를 전부 무시한 채 도망쳐버린 저를 아무런 사심 없이 진심으로 계속해서 신경 써주신 것에 나름 깊게 감명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요. 결국에는 당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저… (수줍은 듯 괜히 헛기침한다.) …저와 함께 해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할 뿐이군요.

     

    쿼너, 엘더의 말에 멋쩍은 듯 웃다가 평소답지 않게 약간 진지한 듯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쿼너 : ...엘더… 그거 알아요? (눈을 내리깐 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제가 엘더와 처음 만난 그날... 사실 저도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거.

    엘더 : ! (놀란 얼굴로 쿼너를 바라보며) ...그게… 정말입니까?

    쿼너 : (술잔에 담긴 술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날은 제 오랜 친구가 아파서 한 생명을 다하고 떠나간 날이었어요. 그래도 한편으론 후련하기도 했어요. (눈을 감으며) 친구가 외롭지 않게,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줄 수 있었으니까.

    엘더 : 그런-… (미안한 얼굴로) ...전 그런 것도 모르고...

    쿼너 :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가 어색한 듯 웃으며) ...뭐, 저도 그 당시엔 남들이 저의 일 때문에 슬퍼하는 게 싫어서 티 나지 않게 일부러 밝게 행동했던 것도 있어요. 좋아했던 친구였어서 울고 싶기도 했지만, 그 일로 계속 축 처져 있는 게 싫기도 했고… 속상한 채로 있으면 그 친구도 슬퍼할 테니까요. (엘더에게 바짝 붙으며 밝은 목소리로) 그래도 그날이 있었기에 이렇게 엘더가 저의 소중한 친구가 되었잖아요?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엘더 :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며) 으음… 그, 그런가요.

    쿼너 : (목소리 톤을 차분하게 내리며) ...그동안 말하기 정말 어려운 주제였을 텐데, 오늘 저에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엘더. (미소 지으며) 덕분에 당신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엘더, 쿼너를 잠시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다.

     

    엘더 : (흐뭇하게 웃으며) …저야말로 갑작스러운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것만으로도… 매우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쿼너 : (고개를 끄덕이곤 잠시 뜸을 들인다.) …음, 그리고 하나 더.

     

    쿼너, 뭔가 낯간지러우면서도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잇는다.

     

    쿼너 : 이참에… 서로 친구로서 한 가지 문을 열어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엘더 : (약간 긴장하며) ...무, 무엇을… 말입니까?

    쿼너 : 마음에 담아 둔 상처나 괴로움을 견디기 어려울 때, 서로 나누기로 말이에요.

    엘더 : 으, 으음… (주저하며 대답을 잇지 못한다.) 하지만… 당신에게 저의 짐까지 지우고 싶지 않은데...

    쿼너 : (똑바로 엘더를 응시하며) 엘더, 우린... 생각보다 서로를 잘 몰라요. 좋아하는 것이나 관심사 같은 건 쉽게 말이 오가면서 알아낼 수 있었겠죠. 하지만 내 안의 아픔을 알게 되면 괜히 걱정시켜버리는 건 아닐까, 멋모르고 상처를 건드려버려서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며 서로 정작 중요한 내면의 대화는 회피해왔어요. (잠시 씁쓸한 얼굴로 엘더의 시선을 피하며) 저도 그동안 제 안의 상처를 굳이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진정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한 것도 있고, 그저 어쩐지 침울해 보였던 엘더를 보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며 유추해왔을 뿐이었죠. (다시 엘더를 바라보며) 그렇게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오해가 쌓여서 터져버리거나, 정말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도 도와줄 수 없게 될 거예요.

    엘더 : (자신 없는 듯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그래도… 저로서는 편치 않습니다만...

    쿼너 : (지그시 눈을 감으며) ...엘더가 원하지 않는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지금 당장 제게 모든 것들을 털어놓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정말 힘들고 아파서 견디지 못할 것 같을 때, 언제라도 저와 아픔을 함께 나누고 의지해도 괜찮다는 뜻이에요. (엘더의 등에 손을 올리며) ...그리고 제가 엘더를 걱정한다고 해도, 그건 제가 스스로 선택한 감정이에요. 저의 것이지, 엘더의 것이 아니죠. 그러니 저의 감정까지 떠안을 필요는 없어요.

    엘더 : (쿼너의 말에 감동한 듯 그를 바라보며) 쿼너...

    쿼너 : ...전 엘더를 믿어요, 제가 저 자신을 굳게 신뢰하는 만큼이나요. 그러니… 제가 엘더를 믿는 만큼, 엘더도 자신을 믿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고, 저의 소중한 친구인걸요? 그런 만큼… (엘더를 똑바로 바라보며) …저도 필요할 때, 엘더에게 어느 정도 의지해도 괜찮을까요?

     

    엘더, 자신을 바라보는 쿼너의 눈빛에서부터 사심 없는 진실한 마음을 느꼈는지 서서히 망설임을 거둬두고 결연한 눈빛으로 쿼너를 똑바로 마주 본다.

     

    엘더 :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한 목소리로) …물론, 언제든지. 전 어느 때이든 당신의 소중하고 굳건한 친구이니.

     

    쿼너, 엘더의 대답을 듣곤 안심된다는 듯 미소 짓는다.

     

    쿼너 : …고마워요, 엘더. 이로써 저희의 관계도 확고해진 것 같네요. (술잔을 들어 올리며 밝은 목소리로) 그럼 서로 더 가까워진 기념으로, 힘차게 건배하자고요!

     

    두 사람, 웃으며 경쾌하게 건배하자 검은 실루엣만이 남으며 테라스 하늘 위의 달이 밝게 빛난다. 이후 밤이 깊어 엘더의 저택 안 로비에 있는 커다란 소파 양쪽에 두 사람이 몸을 뉘인 채 각자 담요를 덮고 한껏 졸린 눈을 끔뻑이는 장면으로 이동된다. 적당히 배도 부르고 취기도 적절히 기분 좋게 올라와 금방이라도 잠들어버릴 것만 같은 포근하고 나른한 분위기를 즐기던 와중 엘더, 졸음이 몰려온 듯 느긋이 하품한다.

     

    엘더 : (거리낌 없이 졸음 섞인 긴 하품을 늘어지게 내뱉는다.) 후아암-...

    쿼너 : (눈을 감은 채 미소지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하품소리가 듣기 좋네요~...

    엘더 : 으음…? (게슴츠레해져 풀린 눈으로 쿼너를 흘깃 바라본다. 반쯤 잠긴 목소리로) …그렇습니까…?

    쿼너 : …으응.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좀 의외라고 느꼈죠, 엘더도 졸음을 느끼는구나 하고. 평소에 계속 쉼 없이 일만 하길래 잠을 아예 안 자는 건가 싶었거든요, 그것 때문에 걱정도 좀 됐었고. (웃으며) …다행히도 그런 건 아니었네요.

    엘더 : 아… (멋쩍게 웃으며) …뭐랄까, 평소에는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서도… 이렇게 당신 같은 친구와 함께 있으면, 그런 긴장도 한껏 풀어지게 된달까…

    쿼너 : (나른한 눈빛으로 엘더를 바라보며) 그럼… 그 이전까진 계속 긴장하고 있었던 거예요?

    엘더 : 뭐어, 아무래도 타인과 친밀해지는 건 익숙지 않다 보니. (눈을 감은 채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하지만 지금 이렇게 모든 긴장을 내려놓고 마음을 터놓는 걸 보면, 당신을 그만큼 신뢰하고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군요. 워낙 험한 삶을 살았던 저인데도- (길게 하품하며 담요를 좀 더 바짝 당겨 덮곤 잠기운이 서린 목소리로) …더는 당신에게서 벽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있으니…

     

    쿼너, 엘더에게서 옮은 듯 따라서 졸음 섞인 하품을 내뱉곤 눈을 감고 편안하게 잠들 자세를 잡는다.

     

    쿼너 : …이젠 정말 자야겠어요. 좋은 꿈 꿔요, 엘더.

    엘더 : (눈을 감은 채) …당신도 좋은 꿈 꾸시길, 쿼너.

     

    두 사람, 밤새 이야기를 이어가느라 피곤했던 듯 이윽고 동시에 각자 작게 코를 골기 시작하며 깊은 잠에 빠져든다. 평온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조명 천천히 페이드 아웃.

     


    #06 엘더의 꿈속, 깊은 새벽

    몇 시간 후, 잠들기 직전과는 사뭇 다른 자세로 깊게 잠든 엘더와 쿼너를 향해 천천히 얕게 스포트라이트. 각자 나지막한 숨소리를 내며 평온하게 잠들어있던 그때, 둘의 단잠을 방해하듯 날카로운 초인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엘더 : (때아닌 초인종 소리에 잠이 깨는 듯 눈을 감은 채 인상을 쓰며) …으음…

     

    초인종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엘더, 신경에 거슬리는 듯 슬며시 고개를 들어 눈을 가늘고 날카롭게 뜬 채 초인종 소리가 나는 정문 쪽을 향해 바라본다.

     

    엘더 : (심기가 불편한 듯 날 선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며) …이 시간에 대체 누구지.

     

    엘더, 쿼너가 있는 쪽을 바라본다. 쿼너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꿈속에서 헤매는 듯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다.

     

    쿼너 : (옆으로 누운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코오-…

     

    엘더, 잠시 말없이 잠든 쿼너의 모습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비상용 총을 장전하며 대문 쪽으로 향한다. 대문 앞에서 최대한 전투태세를 갖춘 뒤 문구멍을 통해 바깥에 누가 있는 건지 살피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 불길하게 초인종 소리가 갑작스레 멈춘다. 엘더, 바짝 긴장한 채 밖을 살핀다.

     

    ??? : (음산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어딜 보는 거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돌아보려는 순간, 검은 형체의 누군가가 엘더의 명치를 강하게 내려친다.

     

    엘더 : (속수무책으로 당한 채 쓰러지며) 으윽…!!

     

    엘더, 어떻게든 자신을 습격해 온 존재가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 겨우 고개를 들어 눈을 치켜뜬다. 검은 그림자만이 보이지만, 워커 가문의 모든 가족과 지인을 몰살시키고 자신을 수백 년이 넘게 저주해온 그것은, 확실히 평생을 걸쳐도 모자랄 증오스러운 원수인 엘런 아론 칼린이었다.

     

    엘런의 그림자 : (가소롭다는 듯 엘더를 내려다보며) …그동안 너무 방심하며 산 것 같군.

    엘더 : (어떻게든 일어나 엘런에게 맞서려고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큭… 엘런…!!

     

    엘런의 그림자, 순식간에 쿼너가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엘런의 그림자 : …마침 좋은 제물이 있었군.

    엘더 : …!! (놀라서 숨을 급히 삼킨 후 다급히 쿼너를 부르며) 쿼너, 일어나십시오! 제발…!!

     

    엘더가 쿼너를 향해 부르짖지만, 쿼너는 반응이 없다. 엘런의 그림자가 서서히 쿼너의 몸을 옭아매며 그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엘더 : 쿼너!!

    쿼너 : (괴로운 듯 신음한다.) 으윽…!!

     

    쿼너, 심한 고통에 몸이 바짝 세워지며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잠시 주저앉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엘더를 바라본다.

     

    쿼너? : (공허한 눈빛으로 엘더를 바라본다.) ….

     

    몸은 쿼너였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한 그 공허한 눈빛은 분명한 엘런의 것이었다. 쿼너의 몸이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듯 비틀거리며 엘더를 향해 걸어간다.

     

    쿼너? : …어리석은 자식. (작게 중얼거리며) …언젠간 이런 결말이 올 거란 걸 알면서도…

    엘더 : (걱정되듯 쿼너를 바라보며) …쿼너, 괜찮은-

     

    그 순간 쿼너, 얼음 마법으로 만들어낸 날카로운 고드름으로 엘더의 복부를 순식간에 관통하듯 찌른다. 그때 조명이 암전되었다가 다시 켜지는 동시에 처음 두 사람이 잠들어 있던 장면으로 되돌아오며, 엘더는 놀란 듯 숨을 급히 들이켜곤 화들짝 깨어나 지난 장면이 꿈이었음을 연출한다. 엘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식은땀에 젖은 채 밭은 숨을 몰아쉰다.

     

    엘더 : (놀란 듯 숨을 몰아쉬며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린다.) …꾸, 꿈이었나…

     

    엘더, 놀라서 차갑게 얼어붙은 것만 같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쿼너를 바라보지만, 쿼너는 여전히 작은 숨소리를 내며 세상 모른 채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쿼너 : (여전히 편안한 얼굴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코오-...

     

    평온히 잠든 쿼너의 모습을 보며 안심하려는 순간, 어쩐지 주변이 서늘해진 느낌이 들어 재채기가 나온다. 으슬으슬한 기운에 코를 훌쩍이다 덮고 있던 담요를 좀 더 세게 움켜쥐곤 어두운 주변을 돌아보니, 잠든 쿼너의 주변 소파에 서리가 잔뜩 내려앉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엘더 : (미세하게 오들오들 떨며 곤란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자 입김이 나타난다.) …이런-…

     

    엘더, 이 상태론 그의 곁에서 잠들긴 어렵겠다고 판단한 듯 담요를 몸에 두른 채 자리를 뜬다. 달빛이 밝게 드리운 저택의 테라스 밖으로 나오자, 오히려 달빛이 더 따스하게 느껴질 정도로 포근한 기분이 든다.

     

    엘더 : (테라스 난간에 두 손을 올린 채 심경이 복잡한 듯 작게 중얼거린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건가…

     

    엘더, 작게 한숨 쉬며 고개를 떨군다. 밝게 빛나는 보름달을 보여주며 조명 천천히 페이드 아웃.

     

     


    <제 2막>

    #07 늦은 오후, 엘더의 워커 가 저택 서재

    대략 300년 후, 홀로 햇빛이 들어오는 서재 책상에 앉아 문서를 정리 중인 엘더. 어느 순간부터 쿼너와의 만남이 점차 뜸해지고 한동안은 주로 편지를 통해서만 연락을 주고받은 듯 서재 책상 위에 쿼너가 보낸 편지들이 즐비하다. 그중 가장 위에 있는 편지지의 내용이 쿼너의 목소리로 읽히기 시작한다.

    내레이션(쿼너) : 고마워요, 엘더. 그럼 다음 주 화요일에 엘더네 집으로 놀러 갈게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더라도 오랜 친구랑 만나고 싶은 건 매한가지인걸요. 그럼 나중에 봐요! 당신의 소중한 친구, 쿼너.

    엘더, 쿼너가 보낸 편지를 가만히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다.

    엘더 : …벌써 내일인가.

    엘더 : 마치 행복한 고민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엘더 : (자리를 배회하며) 오랜만에 겨우 만나는 만큼 어떤 걸 준비해놓으면 좋으려나, 그가 좋아하던 서리과 케이크라도 준비해둬야 할까? 아니, 그건 이제 와선 너무 식상한가… 그래도 서리과 칵테일 정도는 준비해두는 게 좋겠지.

    그렇게 기대 가득한 고민을 잔뜩 머릿속에 그려놓던 와중, 갑작스럽게 기분이 싸해지며 속이 미묘하게 쓰려오기 시작한다. 엘더, 약간 경직된 자세로 서서 신경을 곤두세운다. 잠시 그렇게 괜찮아지나 싶다가, 섀도우 스킨이 강제로 벗겨지고 점차 얼굴에 핏기가 가시며 심한 메스꺼움과 함께 현기증이 나기 시작한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확실히 체감하곤 비틀거리며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제정신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그 증세는 급속도로 악화하기만 한다.

    엘더 : (창백해진 얼굴로) 가, 갑자기… 몸이 왜 이러지.

    그때 헛구역질이 수차례 올라오더니, 이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입에서 끈덕진 붉은 독물이 울컥 쏟아져 나온다. 이후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잠시 그 자리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고르며 겨우 고개를 들어 자신이 토해낸 독물을 바라본다.

    엘더 : 이, 이건-... (기겁하며) …벌써 나한테도 이런 시기가 온 건가? (고개를 저으며) 아니, 안 돼, 벌써 이럴 순 없어… 아직 나에겐 버텨야 할 시간이 많단 말이다!

    엘더,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어떻게든 진정하려는 듯 다시 섀도우 스킨을 쓰곤 크게 한번 심호흡한다.

    엘더 : (눈을 가늘게 뜨며) …아무래도… 다시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군.

    그렇게 잠시 가만히 서서 숨을 고르는 엘더의 뒷모습이 보이다 조명 페이드 아웃.

     

     


    #08 워커 가 저택 지하의 어두침침한 실험실

    조명 서서히 페이드 인, 실험실 안에는 실험 재료들을 모아놓은 흰 빛이 환하게 비치는 진열대가 보인다. 엘더, 그중 여러 보랏빛 액체가 든 시험관들이 꽂혀 있는 시험관대가 있는 진열대의 문을 위쪽으로 들어 올린다. 시험관마다 숫자가 적힌 태그가 붙여져 있는데, 맨 왼쪽의 '480'부터 시작해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그 숫자가 대략 100씩 늘어나 가장 오른쪽에는 '1681'이라고 적혀 있어 숫자의 나이대에 채취한 자신의 독물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시험관대 맨 오른쪽에 비어 있는 한 칸에 '1784'라고 적혀 있고 조금 전 토해낸 독물과 같은 붉은 액체가 든 시험관을 꽂아넣자, 맨 왼쪽 시험관에 든 선명한 보랏빛 액체에서부터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붉어지며 마지막에 끼워 넣은 시험관 속 가장 붉은 액체가 되기까지 완벽한 그라데이션을 형성하고 있다.

    엘더 : (심각한 얼굴로) 0.05LD50[각주:5]… 갑자기 독성이 이렇게나 강해지다니…

    엘더, 잠시 그렇게 시험관들을 바라보다가 워커 가문의 자료들을 보관해놓은 반대편 책장으로 가서 손으로 찾아야 할 서적을 훑다가 '워커 혈 유전학'이라고 적힌 서적을 꺼내서 펼친다.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페이지를 넘겨보다 '독성의 변화'라고 적힌 페이지를 발견하곤 찬찬히 읽어본다. 그가 펼친 서적의 페이지에 드문드문 '대대로 이어받는 유전적 결함', '보라색에서부터 붉은색으로 변화', '나이가 들수록 독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최대 0.0001LD50까지 높아진 것을 확인', '...보통 1500세가 넘어가면서부터 물리적 신체를 포기'라고 적혀 있는 문장이 보인다. 엘더, 서적을 덮고 비틀거리며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 중얼거린다.

    엘더 : 아니, 아니야… 이럴 순 없어, 1500세가 넘어서도 별 이상 증세가 없어서 나에겐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 줄 알았는데… 어째서 인제 와서… 하필이면 지금…! (고개를 저으며) 벌써 몸을 포기하기엔 너무 일러… 아직 나에겐 위즈의 일도 남아 있고, 쿼너도 있으니까…

    엘더, 그런 와중 더 큰 두려움을 마주한 듯 몸이 경직된다.

    엘더 : …하지만… 이러다가 그가 곁에 있을 때 조금 전처럼 갑자기 독이 분출하기라도 한다면-...

    엘더,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는다. 그렇게 눈을 질끈 감은 채 잠시 애써 두려움을 억누르다가, 문득 그의 독물을 모아둔 시험관대 주변에 있던 초록빛을 띠는 액체가 든 시험관을 발견한다. 캐비닛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그 실린더를 확인하자, 그 태그에는 '페레그린 셸레, 307'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보인다. 엘더, 잠시 말없이 가늘게 뜬 눈으로 그 시험관을 내려다보다 한 손을 주먹 쥐곤 펴서 의안을 소환하곤 그것을 반 바퀴 돌린다. 그러자 그 너머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 (놀란 듯한 목소리로) …어머, 워커 씨 아니세요? 간만에 무슨 일로-…
    엘더 : (진지한 목소리로) …급히 상담할 게 있습니다. 잠시 시간 괜찮으신지.

    그렇게 엘더가 잠시 누군가와 통화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며 조명 페이드 아웃.

     


    #09 몇 시간 뒤, 셸레 가문 저택 내 페레그린 집무실

    서서히 조명 페이드 인, 다양한 미술품이 벽에 걸려 있는 방 안은 붉은빛을 띠는 엘더의 저택과 대비되는, 온통 녹색과 에메랄드빛을 띠고 있다. 그에 또한번 대비되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한 여성 독 속성 마법사가 고급스러운 집무용 책상에 앉아 반대편 의자에 앉아 있는 엘더를 약간 놀란 기색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여성 독 속성 마법사 : …거의 한 400년만인가요, 갑자기 이렇게 뜬금없이 연락해오실 줄은 몰랐는데.
    엘더 : (감정이 절제된 목소리로) …잡담을 할 여유는 없습니다, 서기관 셸레.
    페레그린 : (차분하게) …반가움 정도는 표해도 괜찮지 않나 싶은데 말이죠, 워커 씨네 가문을 몰락시켰다는 누명으로부터 구해낸 데엔 제 명분도 없잖아 있는데. 나이는 들었어도 딱딱한 분위기는 그때랑 똑같으시네요. (책상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그래서, 이번엔 무슨 용건으로…?

    엘더, 잠시 시선을 내리깔다 천천히 입을 연다.

    엘더 : (고개를 들어 페레그린을 바라보며) 혹시…독성의 중화와 관련한 연구를, 계속해서 저와 협력할 수 있으신지.
    페레그린 : (엘더를 바라보며) 독성의… 중화?
    엘더 : (침착하게) …최근 들어 갑작스럽게 제 독이 분출되고, 기하급수적으로 독성이 강해진 일이 일어난지라. 건너 들은 이야기로는 당신네 혈통은 나이가 들수록 독성이 약해지는 듯합니다만… 저의 독에 이전에 받아두었던 당신의 독을 넣었더니, 독성이 확실히 중화된 걸 확인했단 말이지요.

    페레그린, 가만히 엘더를 바라보다 말을 잇는다.

    페레그린 : …이독제독(以毒制毒)의 방법을 택하시겠다는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잘 알고 계시네요. 저희 셸레 가문의 독은 나이가 들수록 짙은 청록색에서 점차 밝은 녹색을 띠게 됩니다. (방 벽에 걸린 미술품들을 바라보며) 그렇기에 한때는 저희 예술가 가문에선 나이대별로 다양한 독물을 이용하여 녹색 계열의 미술품들을 그려내거나 만들어내곤 했습니다만… 그 오묘한 녹색에 이끌린 다른 속성의 마법사들이 의도치 않게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저의 가문 사람들은 한동안 사회에서 '저주받은 녹색'이라고도 불리기도 했죠.

    페레그린,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한 미술품 쪽으로 걸어간다. 그 미술품에는 한 얼음 마법사의 마법으로 림에 쌓인 하얀 눈이 시간이 지나면서 녹아 밝은 녹색의 잔디밭이 자라난 풍경이 그려져 있다. 페레그린, 미술품의 잔디밭이 그려진 부분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간다.

    페레그린 : …하지만 독성도 함께 점점 약해져, 최후에는 저희의 독은 인간 혼혈 마법사와 비슷한 마력의 정도로 중화하게 됩니다. 또한 독립적일 땐 다른 독 속성 마법사의 독과 마찬가지로 타 속성의 마법사에겐 매우 위험한 물질로서 존재하지만, 다른 성질의 독과 융합하면 그 독성이 사라져버리는, 일종의 '해독' 작용이 일어나기도 하죠. 덕분에 이쪽의 독을 이용하여 해독제를 개발하는 시도도 나름 있었습니다만, 마법사들도 참 어리석지요. 독에 독을 넣으면 그저 독성이 2배로 늘어날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

    페레그린, 책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서적을 찾는 듯 한 손으로 책등을 죽 훑는다.

    페레그린 : …어찌 되었든, 워커 씨는 이미 꽤 능력 있는 과학자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동안 저희 가문에서 연구한 바로는 유전은 '각인'과도 같아서, 다른 성질의 것을 투입한다 하더라도 그 특성은 변함없이 유지된다고 합니다. (찾아낸 서적을 꺼내 펼치며) 그래서 이쪽의 자원을 토대로 독 성분을 혈류로 내보내 이식한다 하더라도, 결국엔 다시 그 치명적인 독성의 붉은색으로 돌아오겠지요.
    엘더 : (착잡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곤) …그건 이미 전부 지극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번 심호흡하곤) …앞으로 120년간, 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반드시 살아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연구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뿐이니. (페레그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번만 더 저를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페레그린, 엘더의 결연한 눈빛에 약간 놀란 기색을 보이다가 잠시 생각하는 듯한 행동을 취하곤 천천히 말을 잇는다.

    페레그린 : 대신에… (엘더를 바라보며) 조건 하나가 있어요.
    엘더 : (눈을 가늘게 뜬 채 페레그린를 바라보며) …조건… 말입니까.
    페레그린 : 음, 제가 사실 플람베제 대학 역사학 전공이라서요. 워커 씨네 가문 역사가 매우 오래된 만큼, 역사나 지질학과 관련된 서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눈을 빛내며) 제가 언제든 와서 빌려 가도 괜찮을까요?

    엘더, 그런 페레그린의 모습을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곤 대답한다.

    엘더 : …제 독을 색 염료로 사용하게 해달라는 부탁 정도는 될 줄 알았더니. (그런 시답잖을 정도로 가벼운 부탁을 뭐하러 이렇게까지 부탁하느냐는 듯한 말투로)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이젠 낡아빠진 기록들일 뿐이니.
    페레그린 : 어머, 그럼 차라리 그렇게 부탁할 걸 그랬나 보네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담이에요, 예전 사고 이후부턴 저희 가문은 미술품에 독 따위는 사용하지 않으니까요. (엘더를 빤히 바라보며) 뭐, 저희 가문에 독과 관련해서 연구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니, 워커 씨의 독액 샘플이라도 남겨주신다면 당신의 연구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는걸요?

    엘더, 잠시 생각하다 어쩔 수 없겠다는 듯 한 손으로 제복 안쪽에서 붉은 액체가 든 작은 병 하나를 꺼내 페레그린에게 건넨다.

    엘더 : (심각한 얼굴로 페레그린을 바라보며) …반드시 취급에 주의해 주십시오, 다른 속성의 마법사들에게 조금이라도 닿기만 해도 치사량일 정도이니.
    페레그린 : 후후, 걱정하지 마세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엘더가 내민 작은 병을 받아들며) 마치 미술품 제작에 필요한 소중한 물감들처럼 귀하게 여길 테니까. 그럼 필요하실 때 언제든 연락해주세요, 저희도 뭔가 성과가 있으면 알려 드릴게요.

    페레그린, 고고하게 웃는다. 엘더,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쾌활한 모습을 보이는 페레그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잠시 쓸쓸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보이며 조명 천천히 페이드 아웃.

     


    #10 다음 날 늦은 아침, 워커 가 저택 로비

    드디어 엘더가 쿼너와 만나는 약속의 날. 엘더, 초조한 듯 계속해서 대문 앞에서 배회한다. 약속 시각이 다가올수록 초조함은 더욱 커지는 듯 정신이 산만해지는 느낌이다.

    엘더 : (고뇌하듯 중얼거리며) …모르겠어… 그가 있을 때 어제처럼 갑자기 독이 분출해버리는 건 아닐까? 이대로 가만히 놔뒀다간 그가 위험해질지도 몰라, 급히 연락해서 약속을 취소해야 할까…? (고개를 저으며) …아니, 수년 만에 겨우 잡은 약속을 갑자기 깨뜨리는 건 말도 안 돼… 게다가 일정을 미룬다고 해서 그때도 독이 분출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엘더, 숨을 고르며 진정하려는 듯 눈을 지그시 감는다.

    엘더 : …그래, 오늘은 괜찮겠지… (주먹을 꼭 쥐며) …독도 충분히 내보낸 데다, 그저 어제 잠깐 그런 것뿐이니까. 침착하게 행동하면 될 거야…

    그렇게 홀로 불안에 떨던 와중, 쿼너가 왔는지 문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엘더,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터라 사소한 초인종 소리에조차도 깜짝 놀라지만, 어떻게든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문고리를 잡은 채 눈을 감고 크게 한번 심호흡한다.

    엘더 : (중얼거리듯) …침착하게 행동하면… 아무 문제도 없어.

    엘더,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어 문 너머에 있는 쿼너를 반겨준다.

    엘더 :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약간 횡설수설하듯) 쿼너! 드디어 다시 만나뵙는군요!
    쿼너 : 엇-... (엘더의 반응에 약간 당황하며) …저, 그… 무슨 일 있었나요?
    엘더 : (쿼너의 말에 당황하지만 어떻게든 제정신을 잡으려 애쓰며)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대충 얼버무리며 쿼너를 안쪽으로 들여보내듯 손짓하며) …일단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두 사람, 저택 안으로 들어선다. 쿼너, 약간 어리둥절하면서도 오랜 친구와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에 웃음 지으며 저택 로비의 푹신한 소파 위에 앉는다.

    쿼너 : (소파를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이 소파도 반갑네요~ 다른 데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폭신폭신해서 그리웠는데.
    엘더 : 아…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하하, 그렇습니까.

    엘더, 겨우 정신을 잡은 듯 조금 전보다 진정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며 한쪽의 잔엔 차가운 아이스티를 따라서 쿼너에게 건네주고, 자신의 찻잔엔 따뜻한 홍차를 따른다.

    엘더 : (홍차가 든 찻잔을 들며) 그나저나… 당신과는 꽤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 느낌이군요. 그동안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직접 만나는 건 거의 수 년 만인 듯한…
    쿼너 : 아앗, 벌써 그렇게 됐나요? (멋쩍게 웃으며) …그렇네요, 최근 이런저런 일에 신경 쓰다 보니…
    엘더 : …뭐, 당신이 연애를 시작한 이후부턴 전보다 더 바쁘게 지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긴 했습니다만… (농담하듯 웃으며) …그래도 오랜 친구를 이렇게 내버려두어야 하겠습니까.

    쿼너, 엘더의 농담에 작게 웃음 짓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연다.

    쿼너 : (조심스럽게) 저기… 엘더.
    엘더 : 음…? (차를 마시며 쿼너를 바라본다.)
    쿼너 : (수줍은 듯 몸을 꼬며) 오늘 엘더랑 만나기로 한 건, 사실… 한 가지, 부탁할 게 좀 있어서예요.
    엘더 : 부탁? (살짝 긴장하며) 어떤 부탁을…
    쿼너 : 으음, 그러니까… (홍조를 띠며) 제가 곧… 결혼을 하게 됐거든요.

    엘더, 쿼너의 말에 약간 놀란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엘더 : 결국, 그렇게 결정된 겁니까?
    쿼너 :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으응.
    엘더 : (웃음 지으며) 세상에, 정말 축하합니다. 이로써 당신도… 새로운 가족을 꾸리게 되는 거군요.
    쿼너 : 헤헤, 고마워요…

    쿼너,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인다.

    쿼너 : 저기, 그래서 제 부탁이 뭐냐 하면… (엘더의 눈치를 보며) 혹시 제 결혼식에서, 엘더가… 주례를 서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엘더 : …예? (정말로 예상치 못한 말을 듣자 아까보다도 더 놀라 굳은 채로 서 있는다.) 제가… 말입니까?
    쿼너 : (고개를 끄덕이며) 네, 엘더가 말이에요. 그동안 엘더랑 함께 이것저것 이야기하면서 알게 된 거지만, 엘더는 아내분이랑 엄청나게 오래 함께 지냈던 것 같고,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서로 계속해서 사랑해왔던 것 같았거든요. 보통은 그러기 쉽지 않아 보이던데… (볼을 긁적이며) 엘더가 제 주변 사람 중에서 가장 결혼 경력이 길었기도 하고, 저도 오랫동안 헬라랑 사랑하며 지내고 싶어서… 이참에 엘더에게 축복을 받아보면 어떨까 해서요.

    엘더, 쿼너가 말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놀라움이 채 가시지 않아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찻잔을 든 채 굳은 상태로 가만히 서 있는다. 쿼너, 엘더의 그런 모습을 보곤 약간 당황한 듯 진땀을 흘린다.

    쿼너 : (손사래 치며) 아, 혹시 싫으시다면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너무 큰 부담일 수도 있으니까…
    엘더 :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듯)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얼굴을 붉힌 채 헛기침하며) 당신에게 이런 기쁜 제의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서… 좀 많이 놀란 것뿐입니다.
    쿼너 : 아하하… (머쓱한 듯 웃으며) 너무 갑작스러웠나요? 미안해요, 그동안 결혼 준비에 힘쓰느라 말해 드릴 겨를이 없었어서… 이왕이면 오래 알고 깊게 지낸 친구가 해준다면 더 좋을 것 같았거든요.
    엘더 : (작게 웃으며) …당신에게 이런 부탁을 받게 되다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더, 쿼너의 제의에 대한 기쁨도 잠시 무언가 걱정이 되는 듯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엘더 : …제가 직접 주례를 서게 되면, 어쩌면 분위기가 경직되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
    쿼너 : 왜, 왜요…?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엘더를 바라보며) 축사가 좀… 준비하기 많이 어려우신 건가요?
    엘더 : (손을 가로저으며)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쿼너의 시선을 피하며) …당신을 위한 축사라면 얼마든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이래 봬도 나름 글 쓰는 데에는 재능이 있으니.
    쿼너 : 음, 그럼… (잠시 생각하나 싶더니) 너무 오랜만에 사람들 앞에 서게 돼서 긴장되시는 건가요?
    엘더 : …으음…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 듯) 뭐, 그런 것도 없잖아 있긴 하지만…
    쿼너 :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에이, 그런 거라면 괜찮을 거예요! 엘더는 그동안 엄청나게 많은 무대 위에 올랐다면서요, 그것도 주연으로요! 그 정도면 충분히 다른 사람들 앞에서 능청스럽게 잘 넘어갈 수 있지 않겠어요?

    엘더, 쿼너의 말에 약간 표정이 굳은 채 그를 가만히 내러다본다. 쿼너, 그러한 엘더의 모습에 무언가 아차 싶었는지 장난기를 거두고 살짝 몸을 움츠러든다. 엘더, 들고 있던 찻잔을 가까운 책상 위에 내려놓고 침착하게 말을 이어간다.

    엘더 : (진중한 목소리로) …그게 가능했던 건, 웬만한 역할에서는 저의 속성을 철저히 숨기고 완벽히 다른 속성의 마법사로 변장한 채 저의 역을 소화해냈기 때문입니다. 독 속성 마법사가 주연이기라도 하면 관객은 찾아오지도 않았고, 있다 해도 야유하고 돌을 던지려고 일부러 찾아온 악질적인 관객이 대부분이었죠. 그런 일이 일어난 후에는 강제로 계약이 종료되기도 했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게 그저 당연한 일인 것마냥 일어났죠. 제가 온전히 독 속성으로서 무대에 서거나 모습을 드러낸 경우는 극히 드물단 말입니다. (시선을 창밖으로 옮기며) 연극 업계에서 은퇴한 지 벌써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독 속성 마법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약간 인상 쓰며) 당신은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으나, 당신과 이곳저곳을 함께 다니던 시절, 문전박대를 당하거나 무례한 말을 듣는 등 부당한 대우도 자주 받곤 했잖습니까. 당신 또한 림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얼음 속성이기도 하니.
    쿼너 : 으음… (엘더의 말에 부정할 순 없는 듯 시선을 피하며) …그렇긴 하지만…
    엘더 : 또한 행여나 제가 다른 속성으로 변장한다고 해도, 그건 결국 당신의 연인을 속이는 것밖에 되지 않잖습니까. (쿼너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이건 비단 당신 한 명으로 괜찮은 문제가 아닙니다, 쿼너. 혼인은 결코 당신 혼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니. (팔짱을 끼며) 친구분들은 어떨진 모르겠으나, 당신의 연인 쪽 사이에선 독 속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장담할 수가 없잖습니까.

    쿼너, 엘더의 주장에 반박하지 못하고 잠시 고민하듯 뜸을 들이다가 말을 잇는다.

    쿼너 : …그럼… (고개를 들어 엘더 쪽을 바라보며) 제가 미리 헬라에게 엘더를 직접 소개해주면 어떨까요?
    엘더 : (약간 놀란 눈치로 쿼너를 바라보곤) 저를…말입니까.
    쿼너 :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 결혼 준비 관련해서 이것저것 이야기할 것도 많아서, 그래도 한 번쯤은 같이 만나서 의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쩌면 예상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엘더, 쿼너의 제안에 자신이 없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곤 쿼너가 앉아있는 소파의 반대쪽에 걸터앉은 채 고개를 떨군다.

    엘더 : (씁쓸한 얼굴로) …전 잘 모르겠습니다, 쿼너. 이런 일을 크게 벌였다간 오히려 더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당신의 연인 관계에도 괜히 안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건 아닐지…
    쿼너 : 뭐어, 분명 헬라도 이해해줄 거로 생각해요. (웃으며) 안 된다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없진 않을 테니까요!

    엘더, 여전히 마음이 쓰이긴 하지만 주례를 부탁할 정도로 자신을 생각해 준 쿼너의 마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은지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겨우 고개를 끄덕인다.

    엘더 :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보는 것으로 하죠.
    쿼너 : 고마워요, 엘더! (기쁜 듯 웃으며) 그럼, 다음 주 중에 제가 다시 연락할게요, 날이 정해지면 그때 플로의 아랫마을 광장에서 봐요!

    엘더, 기뻐하는 쿼너를 보며 엷게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잠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가 차갑게 식어버린 차를 다시 들어 한 모금 마시는 그때, 스쳐 지나가듯 불안한 눈빛이 보이며 조명 페이드 아웃.

     


    #11 3주 뒤 플로의 낮은 지대, 얼음 마법사들의 마을

    다른 플로의 험한 지형들과는 달리 평평하고 완만한 지대에 있는 얼음 마법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의 광장. 바람도 별로 불지 않아 활동하기 좋은 기후로 간간이 얼음이 아닌 다른 속성의 마법사들도 보이는 것 같다. 그렇게 쿼너와의 약속 장소로 향하는 엘더를 향해 스포트라이트.

    엘더 : (혼잣말하듯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이 모습으로 괜찮으려나…

    엘더, 괜히 긴장되는 듯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잠시 후 저 멀리서 쿼너와 그의 예비 신부인 헬라다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쿼너, 저 멀리서 엘더를 발견하곤 그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든다.

    쿼너 : (환하게 엘더를 맞이해주며) 엘더! 여기에요!

    엘더, 멀리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쿼너를 발견하곤 그를 향해 걸어가지만, 그의 옆에 헬라다가 있는 걸 보고선 순간 발걸음이 멈칫한다. 그렇게 얼음 마법사 부부와 엘더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겨난 상태가 만들어진다.

    쿼너 : (웃으며)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고마워요, 오시는 도중에 춥진 않으셨어요?

    엘더 : 뭐어, 오늘은 그리 바람은 불지 않으니... (쿼너 옆에 서 있는 헬라다를 바라보며) ...음, 그럼... 이 분께서...?

    쿼너 : (고개를 끄덕이며) ...아, 네, 맞아요. (엘더를 바라보고 헬라다 쪽으로 한 손을 내밀며) 엘더, 이쪽이 곧 제 아내가 될 헬라다라고 해요. (헬라다를 바라보고 엘더를 향해 한 손을 내밀며) 헬라, 내 정말 오랜 친구… 엘더라고 해.
    엘더 : (약간 어색한 듯 잠시 쭈뼛대다) 그... 처음 뵙겠습니다, 쿼너 측 친구… 엘더 워커라고 합니다.

    엘더, 헬라다를 향해 모자를 살짝 들어 인사한다. 헬라다, 엘더를 보자마자 놀란 듯 뒷걸음치며 급히 쿼너의 뒤로 숨는다.

    헬라다 : (질겁하며) 보라색 머리… 독 속성…!
    쿼너 : 으응? (고개를 돌려 헬라다를 바라보며) 헬라, 왜 그래?
    헬라다 : (엘더를 경계하듯 쿼너에게 귓속말로) ...쿼너, 저 사람이 친구라고?
    쿼너 : (방긋 웃으며) 응, 왜?
    헬라다 : (인상 쓰며) 친구가 독 속성이라는 건 말 안 해줬잖아!
    쿼너 : 응? (머리를 긁적이며) 그거 말해야 하는 거였어...?
    헬라다 : (날카로운 목소리로) 제정신이야? 독 속성은 우리한테 충분히 위험하고도 남는다고! 그게 얼마나 끔찍한지 모르는 거야?

    헬라다, 쿼너의 뒤에 숨은 채 엘더를 쏘아본다. 쿼너, 헬라다를 달려주려는 듯 손을 잡는다.

    쿼너 : 에이, 그래도 헬라 다음으로 내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인걸. 날 다치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어!
    헬라다 :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정말이야?
    쿼너 :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물론이지, 날 믿어!

    헬라다, 잠시 고민하다 결국 엘더 앞에 서서 고개만 까딱이며 인사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의심이 서린 듯한 태도를 보인다.

    헬라다 : (쌀쌀맞은 목소리로) ...처음 뵙네요.
    엘더 : … (상대가 자신에게 반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정중하게) ...저야말로.
    헬라다 :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래서, 저와 쿼너의 결혼식 주례를 맡게 되셨다고요?

    쿼너, 기류가 심상치 않은 걸 느끼곤 긴장한 채로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헬라다와 엘더를 번갈아 바라본다.

    엘더 : …으음, 아직 확실히 결정 난 사안은 아니지만… (살짝 헛기침하곤) ...오랜 친구의 부탁이라면,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에…

    헬라다, 엘더의 말을 듣곤 쿼너를 향해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것이냐는 듯한 날 선 눈빛을 보낸다. 그리고 엘더를 향해 다시 돌아보며 냉정하게 말을 이어간다.

    헬라다 : (차가운 말투로) 쿼너하고 친구분이시라고요?
    엘더 :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그렇습니다만.
    헬라다 : (팔짱을 끼며) 어쩌다 쿼너와 친해지셨는진 모르겠지만, 그쪽은 우리 쿼너에겐 위협적인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엘더, 헬라다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문다. 쿼너, 당황스러운 상황에 안절부절못한다.

    쿼너 : (진땀을 흘리며 작은 목소리로) 헬라, 왜 그래! 우리 축하해주러 온 사람한테…
    헬라다 : (단호하게 쿼너의 말을 자르며) 아니,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엘더를 냉랭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당신과 같은 위험한 마력을 가진 분께서, 안전하게 식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죠? 뭐, 제가 아니더라도… 제 지인 쪽은 독 속성을 그다지 환영하는 느낌은 아니거든요. 제 어머니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엘더, 헬라다의 말에 반박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서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는다.

    헬라다 : (고개를 기울인 채) 결론은 잘 생각해보시라는 거죠. 그쪽의 섣부른 판단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셨으면 하네요, 그게 저희한테 진심이 담긴 축복일지도 모르니까.

    헬라다, 화가 난 듯 혼자서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쿼너 : 헤, 헬라...! (당황한 채 엘더를 미안한 얼굴로 바라보며) 미-미안해요, 엘더...
    엘더 : (약간 씁쓸한 듯 모자를 앞으로 살짝 눌러쓰며) ...아닙니다, 이런 취급도...이젠 익숙하니.
    쿼너 : (여전히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미안해요, 지금은 아무래도 헬라를 달래주러 가봐야겠어요. 정말로 미안해요…!

    쿼너, 헬라다가 사라진 쪽으로 달려간다. 씁쓸한 얼굴로 쿼너가 달려나간 쪽을 바라보는 엘더의 모습이 보이다가 천천히 조명 페이드 아웃.

     


    #12 며칠 뒤 한낮, 엘더의 저택 서재

    조명이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방 안으로 햇빛이 흘러들어온다. 엘더, 책상 앞에 앉아 침울한 얼굴로 그동안 쿼너에게서 받은 편지지를 정리하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조용한 분위기를 연출하다 정적을 뚫고 초인종 소리가 들려온다. 엘더, 초인종 소리를 듣곤 정리한 편지지를 서랍 안으로 넣어둔 뒤 자리에서 일어서 방 밖을 나선다. 그리고 저택 로비로 나와 대문을 열자, 그 앞에는 잔뜩 위축된 채 서 있는 쿼너의 모습이 보인다.

    쿼너 : (문이 열릴 줄 예상 못 한 듯 깜짝 놀라며) 에, 엘더! 으음…

    쿼너, 어색한 듯 시선을 내리깐 채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쭈뼛대며 서 있는다. 그런 쿼너를 말없이 가만히 내려다보는 엘더의 모습이 보이다가, 저택 안의 게스트룸으로 배경이 이동된다. 쿼너, 소파 한쪽에 앉아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가만히 손을 꼼지락댄다. 엘더, 쿼너에서부터 조금 멀찍이 떨어진 창문 쪽에 가만히 기대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린 채 서 있으며 둘 사이의 거리감을 연출한다. 한동안 말없이 둘 사이에 경직되고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다가, 지난 일이 계속 신경 쓰이는지 쿼너, 엘더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연다.

    쿼너 : (머뭇거리며) …미안해요, 엘더. 저번에는 너무 경우가 없었어서…
    엘더 : …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아닙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잠시 둘 사이에 또다시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쿼너, 한동안 망설이다 말을 다시 잇는다.

    쿼너 : 사실은… 그 날 엘더를 만나기 이전에, 헬라에게는 엘더가 독 속성이란 걸 이야기해주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직접 사람으로서 만나보고 판단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었는데… (고개를 떨군 채) 이기적이게도… 너무 제 생각만 했었나 봐요.

    엘더, 말없이 가만히 쿼너의 말을 듣는다.

    쿼너 : …그때 헬라가 뛰쳐나간 이후로, 이야기를 좀 나눠봤어요. 무슨 사정이라도 있었는지… (시선을 내려다보며) 알고 보니 헬라의 아버님께서… 옛날에 독 속성 마법사에게 안 좋은 일을 당했었나 봐요. 아버님께서 안 계신다는 사실은 이전부터 알긴 했지만, 그런 사정이 있었던 줄은…
    엘더 : … (말없이 가만히 서서 시선을 내려다본다.)
    쿼너 : …그때 이후로 씻어낼 수 없는 상처가 남아서, 지금까지도 독 속성 마법사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아요. 독 관련된 것에 사소하게 연관되어 있어도 곧바로 날이 서지는 것 같고… 그래서 그때도 그렇게 과민 반응이 나왔던 것 같아요. 결혼식 때에도, 음… 그래서…

    쿼너, 망설이듯 우물쭈물하며 대화를 잇지 못한다. 엘더, 쿼너가 할 말을 눈치챈 듯 앞으로 나서며 쿼너를 향해 웃어 보인다.

    엘더 : (밝은 목소리로) …다녀오십시오.
    쿼너 : (놀란 표정으로 엘더를 바라보며) 에, 엘더…?
    엘더 : 결혼식, 저 없이 다녀오셔도 괜찮습니다. 당신에겐 저 말고도 좋은 친구가 많으니, 저 한 명쯤 그 자리에 없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쿼너 : (미안한 얼굴로) 정말 괜찮은 거예요…? 분명 실망스러우셨을 텐데…
    엘더 : (고개를 저으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주례 자리의 제의를 받은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매우 기쁜 일이니.
    쿼너 : … (잠시 말없이 엘더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며) …정말 미안해요, 이번에 정말 엘더에게 부탁하고 싶었는데…
    엘더 : (쿼너가 걱정하지 않도록 장난스럽게 웃으며) 뭐, 축의금 정도는 절대 실망스럽지 않을 정도로 드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오히려 그날이 다가오기만을 기대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쿼너, 엘더가 자신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 일부러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을 눈치채곤 살짝 씁쓸한 듯 시선을 내리깔지만, 그래도 그의 노력을 헛되이 만들고 싶지 않은 듯 애써 웃어 보인다.

    쿼너 : …고마워요, 엘더. (볼을 긁으며) 신혼여행 다녀오면, 그동안 있었던 재밌는 일들을 마구마구 이야기해 드릴게요!
    엘더 : 하하, 벌써 기대가 되는군요. 꼭 잊지 말고 들려주셔야 합니다?

    두 사람, 훈훈하게 웃음 짓는다. 그렇게 조명이 한번 암전되었다가 다시 켜지며, 왼편에선 홀로 어둑한 그의 방에 있는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 편지를 쓰는 듯한 엘더의 모습이, 오른편에서는 밝고 화려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치르는 쿼너와 헬라다의 모습이 함께 보인다. 오른편의 얼음 속성 부부 사이에 주례 담당으로 보이는 땅 속성 마법사가 그 둘을 향한 축복이 담긴 연설을 마무리하고 있다.

    땅 속성 마법사 1 : 신랑, 신부에게 만년설처럼 영원한 사랑의 축복을!

    연설을 마치자마자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하늘에서는 꽃가루가 날리며, 신부인 헬라다가 뒤로 부케를 던지자 사람들이 그 부케를 차지하기 위해 아옹다옹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시끌벅적한 오른편의 결혼식 현장과는 달리, 왼편의 어두침침한 방에서 엘더는 편지를 모두 작성하고 골드 동전과 함께 편지봉투에 넣어 봉인한 뒤 겉옷을 챙겨입고 밖을 나서 쿼너의 결혼식장 앞 방명록 앞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엘더, 갑작스럽게 정신이 아득해지며 심한 메스꺼움이 느껴지더니, 저번처럼 또 속에서부터 독물이 분출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곤 급히 사람이 없는 구석진 곳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또다시 붉은 독물 덩어리를 한차례 토해내고 난 후 현기증이 나는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밭은 숨을 고르며 초점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올려다본다.

    엘더 : …이대로는… (쓸쓸한 표정으로) …더는 안 될 것 같군…

    엘더,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무대 오른편의 예식장에선 신랑을 부르는 다른 지인의 목소리에 쿼너가 자리를 뜨는 것으로, 무대에는 혼자 힘없이 남겨진 엘더의 모습을 보여주다 천천히 조명 페이드 아웃.

     


    #13 수년 뒤, 림의 노을 지는 바닷가

    천천히 조명 페이드 인,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과 바닷가와 함께 모래밭의 벤치에 엘더 홀로 앉아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엘더,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듯 가만히 림의 바닷가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지만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잠시 그렇게 주황빛을 띠는 노을 아래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자리를 지키다, 저 멀리서 쿼너가 엘더를 발견하곤 그에게 다가가 반갑게 부른다.

    쿼너 : (밝은 목소리로) …엘더!
    엘더 : (생각에 잠겨 있다가 쿼너가 왔음을 뒤늦게 알아챈 듯 정신을 차리며 쿼너 쪽을 바라본다.) …아, 쿼너…
    쿼너 : 헤헤, 엄청 오랜만이네요~ 보고 싶었던 걸요. (밝게 웃으며) 할 얘기가 정말 많았다고요!

    엘더, 밝게 웃는 쿼너의 얼굴을 보곤 착잡한 기분이 드는 듯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고개를 떨군다. 이후 장면이 이동되며 바닷가에서 두 사람이 산책하듯 정면을 향해 천천히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쿼너는 신이 나서 엘더에게 여행 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지만, 엘더는 그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침묵한 채 고민을 담아둔 듯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며 길을 걷는다. 바다 너머에서부터 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오며 서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쿼너 : (신 나게 이야기하며) …그래서 그때 헬라가 심통을 부렸는데, 그 모습도 어찌나 사랑스러웠던지~...
    엘더 : … (여전히 침묵한 채 굳은 얼굴로 묵묵히 길을 걷는다.)
    쿼너 :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역시 밀로의 유적 지대 쪽이었는데, 바다와 이어지는 호수 같은 풍경이 엄청 신비로웠죠!
    엘더 : … (변함없이 쿼너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가만히 길을 걷는다.)
    쿼너 : 나비 온천에 갔을 때는 물을 실수로 전부 얼려버릴 뻔해서 혼났지 뭐예요, 다행히도 그러지는 않았지만요! 하하-...

    쿼너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꺼내지만, 엘더는 여전히 말없이 앞을 향해 걷다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춘다. 쿼너가 엘더보다 몇 걸음 앞서 걸어가 둘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겨난다. 엘더, 오랜 침묵을 깨고 겨우 입을 연다.

    엘더 : (단호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쿼너.

    쿼너, 엘더를 향해 뒤로 돌아선다.

    엘더 : ...당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잠시 망설이듯 말을 주저하다 쿼너를 똑바로 바라보며)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꼭 들어주십시오.

    쿼너, 평소 잘 보지 못했던 엘더의 진중한 분위기에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인다. 엘더, 괴로운 듯 바로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을 한번 지그시 감았다 뜨며 힘겹게 입을 연다.

    엘더 : (결연한 눈빛으로) ...정말 미안하지만, 쿼너. 앞으로 당신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쿼너, 갑작스러운 엘더의 통보에 놀라 말문이 막히며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쿼너 : (당황하며)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엘더 : (침착하게 말을 이어가며) ...말 그대로입니다. 이제부터 앞으로는 제가 당신과 만날 일은… 더는 없을 거라는 뜻이죠.
    쿼너 : 대, 대체 왜… (엘더의 눈치를 보며) 혹시 제 결혼식에 같이 참가 못해서 화난 거예요…?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엘더를 소외시켜버렸다거나…
    엘더 : ...아아, 그런 건 아니고… (쿼너의 시선을 피하며) ...이게 당신의 가족을 위한 최선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쿼너 : 그, 그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는다.) 왜...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엘더, 약간 울분을 삼키듯 잠시 뜸을 들이곤 심호흡한 뒤 다시 말을 이어간다.

    엘더 : ...전 독 속성입니다, 말 그대로 당신에게 얼마든지 독이 될 수 있는 존재란 말입니다.
    쿼너 : (살짝 안색이 어두워지며) 그 이야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요. 그때도 전 엘더는 저에게 해를 입힌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상관없다고 했는데… (서운한 듯이) 제가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건가요?
    엘더 : (눈을 지그시 감으며)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제게 해 주었던 말은… 단어 하나하나 전부 잊지 않고 가슴에 새겨넣었을 만큼, 당신에게서 들을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말이었으니. 하지만… (주먹을 꽉 쥐며) ...당신은 저에 대해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당신과 친해진 이후부턴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을 거로 생각했고, 언젠가는 이걸 당신에게 말할 때가 오리라 여겼지만, 그게 단지… 지금이 되었을 뿐이죠.

    엘더,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주먹 쥐었다 펴며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엘더 : …제 워커 가문의 혈은 세월이 지날수록 체내의 독성이 점점 강해집니다. 실제로 제 독성도 이젠 정상 범위를 넘어서기 시작했고, 이젠 저의 몸도 견뎌내기 어려운지 조금씩 무리가 오고 있습니다. (한 손으로 목을 쥐며) 최근까지도… 예상치 못하게 독이 분출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불안한 눈빛으로) …언젠간 일어날 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정말로 이 순간이 찾아오니… 어쩌면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해쳐버리진 않을까, 불안감이 엄습해오더군요.

    쿼너, 엘더의 말에 놀라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쿼너 : (약간 충격받은 듯한 얼굴로) …그, 그렇게나 몸이 안 좋았던 거예요?
    엘더 : … (쿼너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은지 시선을 피한 채) …이는 유전의 문제라 해결할 수도 없어서, 저 또한 언제 독성이 분출해버릴지 모를 시한폭탄이 되겠지요. 이대로 당신과 계속해서 함께 지냈다가는… 언젠가는 당신의 목숨을 위협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쿼너 : 그런-... (죄책감이 드는 듯 시선을 떨구며)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엘더 : (가만히 바다 너머 수평선을 바라보며) …처음 당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건, 단순히 제가 낯을 가리는 것만이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언젠간 이런 미래가 다가오리란 걸 알고 있었고, 누군가에게 정을 붙이게 되면 그만큼 역으로 비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죠. (고개를 돌려 슬쩍 쿼너를 바라보며) 하지만… 당신이라는 존재가 저의 내면에 스며들기 시작했을 때, 쓸데없는 욕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한 손을 가슴 위로 올리며) 제 몸이 부서져 버릴지라도, 그리고 그 부서진 파편이 당신에게 튀어버려 상처를 입히게 될지라도, 당신이 그저 저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씁쓸하게 웃으며)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리듯, 점점 갈라져 가는 균열을 모른 척하며 지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엘더, 한탄하듯 가슴 위에 올렸던 손을 힘없이 내린 뒤 작게 한숨을 쉬곤 다시 말을 잇는다.

    엘더 : …하지만 그마저도 이젠 아닌가 봅니다. 점차 다가오는 현실 속에서, 저는 갈망과 두려움의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나의 마지막이 될 인연을 이대로 놓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서로 독이 될 거란 걸 알면서도 붙잡아두어야 하나… 그리고 결국 결과적으로 보았을 땐, 저는 당신에겐 그저 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당신의 곁에 계속 남게 된다면 당신의 가정에 불화가 찾아올 것이고, 물리적으로도 당신을 위험에 빠뜨려버릴지도 모르게 되겠지요.
    쿼너 : (엘더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며) ...엘더, 그렇지만-...

    엘더, 쿼너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독 마법을 발휘하려는 척 급히 두 손을 들어 경계하는 듯한 태세를 취한다.

    엘더 : (쿼너를 노려보며 날카롭지만 감정이 섞인 듯한 고함으로) 당신이 직접 겪어봐야 이해하시겠습니까?!

    쿼너, 갑작스럽게 위협적으로 나서는 엘더의 모습에 놀라 뒷걸음친다. 잠시 서로 그 상태로 대치하다 엘더, 자신을 보고 놀라 멀어진 쿼너의 모습에 자괴감이 밀려오는지 두 손을 내리고 서서히 날 선 눈빛이 거둬지며 시선을 내리깔곤 서글픈 듯 작게 한숨을 내쉰다. 쿼너도 마찬가지로 엘더의 행동에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려 했던 자신의 모습에 당황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다. 그렇게 한동안 침울한 분위기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다 엘더, 힘겹게 입을 연다.

    엘더 :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 더 있습니다, 쿼너. 이건 정말 말하고 싶지 않은 주제였습니다, 특히 당신에게는. (한번 심호흡한 뒤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사실, 저는 항상 누군가에게 쫓기는 신세입니다. 저의 가족과 소중한 인연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시켰을 정도로, 항상 제가 불행하기를 누군가가 존재한단 말입니다.

    쿼너,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나자 어안이 벙벙한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쿼너 : (말문이 막힌 듯 버벅대며)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엘더 : …저의 개인사로 당신을 불안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지만… (괴로운 듯 살짝 인상 쓴 채 한 손으로 반대쪽 팔뚝을 잡으며) …제가 속해 있었던 워커 가문은 사실 단순히 화재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잔인하고도 가혹한 방화 학살에 휘말린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저 한 명까지 처리해내기 위해 계속해서 습격해오면서, 저를 협박하기 위해 제 주변 사람들을 살해하거나 납치하여 고문하곤 했습니다.
    쿼너 : (경악하며) 뭐-뭐라고요…!
    엘더 : (두 팔을 감싸 안은 채 불안한 눈빛으로) …언젠가,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과거 한 자리에서 당신과 함께 친근하게 잠이 들었던 때… 누군가 제 저택을 침입하여 당신을 제압했습니다. 저는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었고, 몸을 그에게 빼앗긴 당신은-… (말을 완벽히 잇지 못한 채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는다.) …그 순간 영원과도 같았던 악몽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제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이대로는 언젠간 정말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겠구나 하며 끊임없이 불안에 떨었고, 그 뒤론 당신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걱정에 사로잡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쿼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안타까움이 서린 얼굴로 엘더를 바라보기만 한다. 엘더, 불안한 듯 쿼너에게서 등을 돌린 채 말을 이어간다.

    엘더 : 당신에게 마음을 연 이후로, 전 항상 걱정에 시달렸습니다. 어쩌면 나를 협박하기 위해 그가 당신을 인질로 잡아 저주를 내리지 않을까. 또 어느 순간 그 사람에 의해 당신이 희생되어버리지 않을까. 그리고 당신을 지켜내지 못하게 되면… 또다시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씁쓸한 눈빛으로) …당신은 상상도 못할 만큼, 저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습니다. 가족이든, 재산이든, 소중한 인연이든… (결연한 얼굴로 쿼너를 향해 돌아보며)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전 소중한 친구를 잃는 비극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습니다, 쿼너. 그것이 결국… (눈을 지그시 감으며) …저와 인연이 완전히 끊어지는 결과가 되더라도.
    쿼너 : (미안함이 섞여 섣불리 말하기 어려운 듯) 엘더…
    엘더 : …그는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 또한 아닙니다. 요구를 무시했다간 정말로 큰일을 저지르거나, 자칫하면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오기도 하니… 이런 제가 당신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당신의 연인분께서 알게 된다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요.

    쿼너, 엘더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말없이 가만히 서 있는다.

    엘더 :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으며) …정말 미안합니다, 쿼너.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알면서도, 멋대로 당신을 저의 내면에 끌어들여버린 안일함 탓입니다. 이제 제게 남은 건 그동안의 이기적인 선택의 인과로 그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는 것뿐이니... (고개를 들어 쿼너를 바라보며) ...앞으로 당신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부탁건대, 이제부턴 당신의 삶에서 저의 조각을 지워내는 대신… 그 자리를 당신의 가족과 함께 채워나가 주십시오.

    쿼너, 엘더의 말을 듣곤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힘겹게 말을 잇는다.

    쿼너 : (슬픈 표정으로) 전... 언제나 엘더와 함께하면서 즐거웠어요. 서로 같이 이곳저곳에 놀러 다니기도 하고, 술도 같이 마시고... 여러 이야기도 같이 나누면서. 그러면서 엘더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게 되었고, 제가 몰랐던 세상에 대해서도 더 깊게 알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엘더였어요. 그런 만큼 엘더는 단 한 번도 제게 독이 된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엘더가 제게서 떠나겠다고 한 그 순간만큼은… 앞으로도 저에게 아픈 추억으로 남게 될 것 같아요.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마음 같아서는 붙잡고 싶지만… 엘더가 편치 않는다면, 말리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돌아와 준다면 언제든 기쁘게 맞아줄 테니까… (애써 엘더를 향해 웃어 보이며) 언제든 행복하길 빌게요, 엘더.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엘더 : (고개를 숙이며) ...정말 미안합니다, 쿼너. 그동안 저도 오랜 시간 동안 당신과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두 사람, 잠시 아무 말 없이 머뭇거리다 이내 서로 포옹한다.

    쿼너 : (엘더의 품에 안긴 채 약간 목이 멘 듯 떨리는 목소리로) …꼭… 건강하셔야 해요, 알겠죠?
    엘더 : (쿼너를 품에 안은 채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위쪽을 바라본 채 떨리는 심호흡을 하곤) …당신의 가정에게도, 언제나 평안의 축복이 깃들기를.

    뜨거운 포옹을 나눈 두 사람, 못내 아쉬워하며 겨우 떨어진다. 엘더,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 모자를 앞으로 눌러쓰곤 미련이 남기 전에 쿼너에게서 등을 돌리며 급히 자리를 뜬다. 그 자리에 쿼너만 홀로 덩그러니 남아 쓸쓸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조명 페이드 아웃.

     

     


    <제 3막>

    #14 7년 뒤의 늦은 오후, 오래된 술집

    주변에서 소곤소곤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과거 엘더가 쿼너와 처음 만났던 술집을 배경으로 조명 페이드 인, 서로 약간 떨어져 있는 두 테이블을 향해 스포트라이트. 한쪽 테이블에는 쿼너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섰던 마법사와 그의 부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순혈 땅 속성 마법사가, 좀 구석진 곳에 멀리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는 음울하게 외로이 잔에 술을 따르는 엘더가 있다.

    엘더 : (한숨을 쉬며) ...여긴 뭐 하러 계속 앉아있는 건지… (입가에 술잔을 갖다 대며) ...전부 각오한 일이 아니던가.

    침울한 엘더의 분위기와는 달리,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명의 땅 속성 마법사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신이 나게 수다를 떨고 있다.

    땅 속성 마법사 1 : ...그나저나, 쿼너 소식 들었어?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다나 봐!
    땅 속성 마법사 2 : 그러게, 이름이 ‘코포’라고 했던가? 작은 눈송이답게 귀여운 이름이지, 정말.
    땅 속성 마법사 1 : 조만간 보러 가야겠어, 아빠를 닮았다니까 분명 그 녀석처럼 얼음 수정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땅 속성 마법사 2 : 선물은 뭘 들고 가면 좋을까? 역시 서리과가 괜찮으려나? (웃음) 그 아이가 커서 언젠가 우리 딸하고 같이 놀 수 있었으면 좋겠는걸!

    엘더, 가만히 두 땅 속성 마법사의 이야기를 엿들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계속해서 술을 들이켠다. 병에 든 술을 다 마신 뒤 두 땅 마법사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위에 대충 골드 동전 몇 개를 던져놓곤 밖을 나서 계속해서 왼쪽으로 걸어나간다. 엘더가 걸어가며 지나치는 사람들이 쿼너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마법사 1 : 그 아이, 아빠를 똑 닮았더라~ 머리에 떠다니는 얼음수정도 똑같아!
    마법사 2 : (팔짱을 낀 채) 친구가 워낙 많아서 오히려 결혼을 못하는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임자가 있었을 줄이야.
    마법사 3 : (고개를 저으며) 별수 없지, 우리 같은 홀몸은 행운이나 빌어주는 수밖에.

    엘더, 지나치는 사람들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시선을 내리깐 채 계속 묵묵히 앞을 걸어나간다. 그런 와중에 배경의 건물이 새로 세워지고 들꽃이 피고 지는 등 시간이 점차 흘러가며, 가족으로 보이는 마법사 무리가 사이를 지나간다.

    어린 마법사 : (아버지로 보이는 마법사의 손을 잡고 앞으로 끌듯 잡아당기며) 아빠, 어서 가요!
    마법사 4 : (진땀을 빼며) 기다리렴, 너무 급하게 갔다간 넘어진단다.
    마법사 5 : (두 마법사의 모습을 보곤 흐뭇하게 웃으며) 호호, 축제에 놀러 갈 생각에 애가 많이 신이 났나 봐요.

    그렇게 마법사 가족이 함께 즐겁게 웃는 모습과 대비되듯 그 곁을 엘더 홀로 스쳐 지나가며 쓸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렇게 한참을 앞으로 걸어가다, 엘더가 걸어가는 방향의 앞쪽에 무언가 걱정스러워 하는 듯한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린다.

    마법사 6 : (걱정스러운 듯) 세상에, 사람들이 산채로 묻혀버렸다나 봐…
    마법사 7 : (고개를 저으며) 그러게, 거긴 워낙 기후도 춥고 사나운 데다 지형이 얼음으로 되어있다 보니 가까이 가기도 어렵지. 웬만한 화염 마법사가 오더라도 구하기 힘들 거야.
    마법사 8 : (혀를 차며) ...끔찍한 일이군, 정말. 얼음 마법사들이 살 만한 곳은 플로밖에 없을 텐데….

    엘더, 마법사 8이 말을 마치자마자 걸음을 멈춘다. 잠시 놀라 굳은 상태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엘더 : (불안한 목소리로) 플로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마법사 8 : (의외라는 듯) 아, 못 들으셨어요? 플로에 엄청난 눈사태가 일어났잖아요. 그곳에 사는 얼음 마법사들도 묻히거나 갇혀버렸다는데, 워낙에 지나다니기 험한 곳이라 구출하기도 어렵겠지요.

    엘더, 마법사 8의 말을 듣곤 놀라서 그대로 얼어붙는다. 그 사이에 다른 마법사들이 다시 제 갈 길을 가며 그 자리에는 엘더 혼자만이 남는다.

    엘더 : (떨리는 손으로 이마에 손을 짚으며) 이, 이게… 사실인가?

    엘더, 급히 애널라이저 창을 꺼내 림과 그 주변의 기후와 지형 상태를 확인한다. 화면에는 플로 지역에 평균 수치보다 수 배 높게 눈이 쌓여있는 것이 나타났고, 충격을 받은 그는 경악하며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다.

    엘더 : (몸을 떨며) ...이, 이런…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그는 괜찮은 건가…!

    엘더, 의안을 통해 쿼너에게 연락을 시도하지만 받지 않는다. 초조한 듯 그 자리를 배회하다 곧바로 그가 있는 플로에 가보려 발길을 돌리지만, 무언가 생각난 듯 잠시 멈칫한다.

    엘더 : ...잠깐, 난 대체 무슨 낯짝으로 그를 보러 간단 말인가? 일부러 그를 내 곁에서 떨어뜨려 놓은 주제에 무슨 면목으로…

    엘더, 그러한 고민도 잠시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린다.

    엘더 : …아니, 지금 뭐 하는 건가! 이럴 시간에 빨리 그가 괜찮은지 살펴야 할 거 아닌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플로가 있는 오른쪽을 바라보며) 쿼너, 제발 무사하기를…!

    엘더, 한 손으로 모자의 챙을 잡으며 플로가 있는 오른쪽을 향해 급히 달려나간다. 조명 페이드 아웃.

     


    #15 눈사태가 일어난 플로

    매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며 괴물 같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얼음 산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 아래에서 엘더, 한 손으로 모자의 챙을 붙든 채 겨우 발걸음을 옮기며 앞으로 나아가다 고개를 들어 거대하고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린 눈더미를 향해 시선을 올린다.

    엘더 : (눈사태가 일어난 현장을 보고 경악하며) 이럴 수가... 쿼너!!

    엘더, 불안한 심정으로 눈밭을 이리저리 헤매며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쿼너를 찾아 나선다. 눈이 깊게 쌓여있어 걸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기는 물론, 가끔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하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을 앞으로 나아가자, 희미하게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 : (눈밭 한구석에서 선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다.) 흑...흑...
    엘더 : …이 소리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자 쿼너가 있다. 그에게로 달려가며) 쿼너!
    쿼너 :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겨우 고개를 든다. 눈물에 젖은 얼굴로) ...에... 엘더…?
    엘더 : (쿼너를 붙잡으며)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쿼너 : (여전히 몸을 떨며) ...저는 괜찮지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헬라랑...제 아들이...
    엘더 : ...!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쿼너를 잡아주며 참회하듯) ...죄송합니다, 괜히 제가 떠나버리는 바람에...
    쿼너 : (힘없는 목소리로) ...아니에요... 절대 엘더의 잘못이…

    쿼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떠다니던 얼음 수정 세 개가 깨지며, 쿼너의 몸에 얼음 가시들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엘더 : ...?! (쿼너의 몸에서 얼음 가시가 돋아나는 걸 보고선 놀라며) 대체 이건...

    엘더, 잠시 쿼너의 몸에서 자라난 얼음 가시를 관찰하다 제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젓는다

    엘더 : (인상 쓰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어서 그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엘더, 쿼너를 안고 급히 의안을 소환하여 워커 가 저택으로 워프하곤 그를 병실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혀 준다.

    엘더 : (겨우 숨을 돌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스포트라이트가 잠시 쿼너가 눕힌 병실 침대를 비추다 조명 페이드 아웃.

     


    #16 며칠 뒤 어느 늦은 오후, 워커 가 저택 내 병실

    무대에는 병실 창문만이 빛을 내뿜는다. 병실에는 침대에 힘없이 누워 있는 쿼너와, 다른 한쪽에는 책상에 앉아 두꺼운 코트를 입고 뜨거운 차를 마시며 애널라이저를 통해 쿼너의 상태를 살피는 엘더의 모습이 보인다. 방 안의 기온은 매우 낮은지 간간이 엘더의 입가에서 입김이 서리는 것이 보인다. 쿼너가 누워 있는 침대를 향해 천천히 스포트라이트.

    쿼너 : .... (겨우 눈을 뜨며 천천히 상체를 위로 세운다. 잠시 멍하니 앉아있다가 가까운 책상에 앉아있는 엘더를 발견하곤) ...엘더…?
    엘더 : ! (플로에서 일어난 사고의 정보가 담긴 애널라이저 화면을 바라보다가 인기척을 느끼곤 놀라 쿼너를 바라본다) 쿼너…!

    엘더, 깨어난 쿼너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엘더 : (걱정하듯) 갑자기 쓰러지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 이런 일이...

    쿼너, 말없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엘더, 쿼너가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잠시 그에게 시간을 내어준다.

    쿼너 : (힘없이 웃어 보이며) ...돌아와 주셨네요, 엘더… 고마워요.
    엘더 : ...아닙니다, 오히려… (쿼너의 시선을 피하곤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저의 아집 하나로… 당신을 내버려두고 멋대로 떠나버린 제가 더 면목이 없습니다.

    쿼너, 멍한 눈빛으로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다.

    쿼너 : ...여긴...
    엘더 : …아, 여기는… 제 저택 병실입니다. 당신의 마력이 더는 빠져나가지 않도록 급한 대로 방 안의 온도를 플로와 비슷하게 낮췄습니다. 덕분에 이 이상으로 상태가 나빠지진 않았습니다만…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깨어나셨더군요.
    쿼너 : (힘없는 목소리로) …헤헤, 역시 엘더는 최고의 의사라니까요… (핼쑥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리듯) …저 같은 거랑은 다르게…

    엘더, 쿼너의 마지막 말이 신경 쓰이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는다. 그렇게 잠시 걱정스러운 듯 쿼너를 바라보다 그의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묻는다.

    엘더 : …음… (말을 주저하다) …혹시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지.
    쿼너 : (괴로운 기억이 되살아난 듯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감싸 쥔다.) ...으윽…!
    엘더 : (당황하며) 아, 아직 말하기 힘드시다면 말하지 않으셔도-...
    쿼너 : (머리를 감싸 쥔 채 진정하려 애쓰며) ...아니에요, 괜찮아요… 잠시만...

    쿼너, 잠시 숨을 고르며 가만히 있다가 겨우 진정한 듯 정신을 차리고 힘겹게 입을 뗀다.

    쿼너 : (떨리는 목소리로) ...갑자기 눈사태가 일어났는데... 헬라랑 제 아이 코포를 덮쳤어요. (눈가에 눈물이 맺히며) 저 혼자만 놔둔 채로… 
    엘더 : ...그런...! (미안함에 고개를 못 든 채) ...당신에게서 멋대로 떠나버린 제 탓입니다, 기후와 관련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걸 미리 알았더라면…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을 텐데…
    쿼너 : (고개를 저으며) 아니에요... (엘더를 향해 힘없이 웃어 보이며) 절대 엘더의 탓이 아니니까... 마음에 두지 말아줘요.
    엘더 : (미련이 남는 듯 쿼너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그래도-...
    쿼너 : 부탁이에요, 자책하지 말아줘요...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며) 엘더마저 그러면... 지금보다 더 괴로워질 것 같으니까....

    쿼너, 고개를 숙이다 목에 자라난 얼음 가시에 턱이 찔려 움찔한다. 엘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쿼너에게 묻는다.

    엘더 : (쿼너의 몸에 자라난 얼음 가시를 바라보며) ...그 가시는 대체…?
    쿼너 : (몸에 자라난 얼음 가시를 바라보며) ...아, 이거 말인가요...? 저희 쪽 얼음 마법사 가족의 특징이래요. (얼음 가시를 조심스럽게 건드려보며) 태어나면 주변에 얼음수정들이 생겨나는데, 거의 죽을 정도로 크게 다치거나 하면 얼음수정이 깨져서 충격을 완화해주는 대신...몸에 절대 사라지지 않는 얼음 가시가 돋아난다고 해요. (손으로 가시를 만지작거리며 힘없이 웃는다.) ...한꺼번에 세 개가 깨지다니, 신기록이네요…
    엘더 : ...이전부터 머리에 돋아나 있던 가시도, 그 흔적이었던 겁니까?
    쿼너 : (고개를 끄덕이며) 뭐... 그런 거죠. 예전에 제가 얼음 절벽에서 떨어져 굴렀던 이야기, 한 번 했었을 거예요. 그게 그 흔적이었죠.
    엘더 : (쿼너에게 남아있는 4개의 얼음 수정을 바라보며) 그럼... 이것들이 전부 깨지면...?
    쿼너 : ...영원히 건강을 잃을지도 모르겠네요... (쓸쓸히 웃으며) ...괜찮아요, 아직 네 개는 남았으니까...

    엘더, 복잡한 심경으로 쿼너의 주변에 떠 있는 얼음 수정들을 바라본다. 이전까지는 저 얼음 수정들 때문에 주변이 급격히 추워져 그 영향으로 감기에 걸리는 경우가 있어 불편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쿼너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었음을 이제야 안 것에 대한 죄책감에 고개를 숙인다. 쿼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몸을 힘겹게 움직인다.

    쿼너: (자리에서 일어나려 애쓰며) ...미안해요, 엘더… 절 여기까지 데려와 주신 건 고맙지만... 전 플로에 가봐야 해요.
    엘더 : (놀라며)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 이 상태로 어딜 가겠단 말입니까!
    쿼너 : 하루빨리 헬라랑 코포를...찾아내야 해요... 더 위험해지기 전에…!

    쿼너, 비틀거리며 병실 침대에서 일어나지만, 그 자리에서 힘없이 쓰러지고 만다.

    엘더 : ! (쓰러진 쿼너를 잡아주며) 이 상태론 안 됩니다, 당신도 위험해진단 말입니다!
    쿼너 : (목소리가 떨리며) 가게 해 줘요… (감정이 북받친 듯 목이 메여온다.) 헬라랑 코포를... 빨리 구해줘야 해요. 시간이 더 지나면... 저도 못 버틸 거라고요…!

    쿼너, 주저앉은 채 몸을 떨며 눈물을 흘린다. 쿼너가 흘린 눈물이 바닥에 닿자 금세 얼어붙어 서리가 되어버린다. 그 순간 과거 워커 가문의 저택이 불타고 가족을 전부 잃은 충격에 쓰러져 울고 있는 젊은 시절의 엘더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듯 보이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엘더, 쿼너를 보며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에 말없이 꿇어앉아 그를 품에 안아준다.

    쿼너 : (엘더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살아있다고 믿고 싶어요... 살아있다고... 제발...!
    엘더 : (쿼너를 안은 채 등을 토닥여주며) ...몸이 괜찮아지시면... 함께 찾아봅시다.
    쿼너 : 흑흑… (엘더를 꼭 안은 채 흐느끼며) 고마워요, 엘더…

    잠시 그렇게 엘더가 쿼너를 달래주는 장면을 보여주다 조명 페이드 아웃. 이후로 엘더가 쿼너를 치료하고 상태를 살피는 모습을 잠깐씩 스포트라이트가 내려진다.

    엘더 : (쿼너의 상태를 살피며)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쿼너 : (힘없이 애써 웃으며) ...괜찮아진 것 같아요, 덕분에...

    조명이 암전되었다가 다시 켜지며 쿼너의 친구들인 여러 마법사가 병문안을 하러 찾아온다. 쿼너의 침실에는 친구들이 선물해준 꽃다발로 가득하다. 그중에서 쿼너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봐주고 이전에 술집에서 쿼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두 명의 땅 속성 마법사도 보인다.

    땅 속성 마법사 2 : (웃어 보이며) 얼른 나아서 다시 같이 놀러 다녀야 할 텐데 말이야~...
    땅 속성 마법사 1 : 맞아, 술자리에 네가 없던 게 얼마나 빈자리가 크던지!
    쿼너 : ...그러게, 하하… (씁쓸하게 웃는다.) 코포랑 너희 딸이 같이 노는 걸 보고 싶기도 하고…

    다시 조명이 암전되었다가 서서히 켜지며 어두운 밤에 병실에서 잠든 쿼너의 곁에서 엘더가 그의 몸에 돋아난 얼음 가시를 살피는 모습이 나타난다.

    엘더 : (조용히 중얼거리듯) …이걸… 없앨 순 없는 건가.

    엘더, 오른눈에 낀 모노클에 애널라이저 기능을 켜며 쿼너의 얼음 가시에 대해서 분석한다. 그렇게 잠시 자세히 살핀 후 오히려 곤란하다는 듯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엘더 : (눈을 가늘게 뜨며) …줄기와 가시에서 대동맥처럼 마력이 흐르고 있군. 이걸 잘라버렸다가는 마력이 과다누출되어 오히려 더 위험해지겠어….

    엘더,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는 듯 조심스럽게 한 손으로 쿼너의 머리에 자라난 얼음 가시를 어루만져본다. 그때 쿼너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쓰며 괴로운 신음을 내자, 놀라서 급히 손을 떼곤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시 한번 조명이 꺼졌다 켜지며 이번에는 쿼너의 곁에 친구로 보이는 자연 속성 마법사가 서리과가 든 과일 바구니를 든 채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며 서 있다.

    쿼너 : (약간 놀란 눈치로) 바르베…? 네가 여기까지 와줄 줄은…
    자연 속성 마법사 : (퉁명스럽게) 그래, 굳이 이런 몸으로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방은 또 왜 이리 추운 거야, 정말이지. (과일 바구니를 쿼너 쪽으로 들이밀며) 이거나 받으셔.
    쿼너 : (과일 바구니를 바라보며) …뭐야, 과일…? (힘없이 웃으며) 여기 와준 사람 중에 과일을 선물로 들고 온 사람은 네가 유일한걸…
    자연 속성 마법사 : 그깟 먹지도 못하는 꽃 들고와서 뭐하게, 차라리 과일 같은 게 낫지. (서리과 하나를 꺼내며) 하나 먹을래?
    쿼너 : (고개를 가로저으며) …고맙지만, 나중에 먹을게. 먼저 하나 먹어.
    자연 속성 마법사 :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리며) 흥, 됐어. 방도 이미 추운데 거기에 또 차가운 걸 먹고 싶진 않거든.

    이후 조명이 암전되고 위 장면들과 비슷비슷한 장면을 수차례 반복적으로 보이며 그 사이사이에 엘더가 저택 지하 실험실에서 밤새껏 얼음 마력을 연구하고 실험하는 모습, 플로와 림, 로블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마법 연구원들에게 조문을 구하러 다니지만 쿼너가 너무나도 희귀한 유형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기에 누군가의 목숨을 함부로 책임지긴 어렵다며 고개를 저으며 연구를 거절당하는 모습, 중간마다 셸레 가문에서 얻어낸 약품 샘플을 팔에 투여하여 자신의 독성을 낮추려는 모습, 혼자서 눈보라가 치는 플로를 헤집으며 쿼너 대신 헬라다와 코포를 찾으러 다니지만 결국 끝까지 찾지 못하여 실망하는 장면이 삽입된다. 게다가 가면 갈수록 쿼너의 주변에 떠다니던 얼음 수정의 개수가 점점 줄어들며, 수십 년이 지나도 쿼너의 상태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악화하고 있음을 연출한다. 마지막에는 어둑한 워커 가 저택 병실에서 눈을 감고 누워있는 쿼너의 모습을 서서 바라보는 엘더의 장면으로 돌아온다.

    엘더 : (쿼너의 상태를 분석한 애널라이저 창을 바라보며 씁쓸한 한숨을 내쉬곤) ...전혀 나아지질 않잖아…

    엘더, 좀처럼 낫지 않는 쿼너를 걱정하며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다. 조명 페이드 아웃. 

     


    #17 어느 날 오후, 워커 가 저택 정문 앞

    천천히 조명이 밝아오며 바깥에 있는 엘더의 저택의 모습이 나타난다. 어쩐지 그 주변에는 독 속성과 얼음 속성 마법사들을 향해 림에서 나가라고 소리쳐대는 마법사들로 부산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잠시 후 쿼너의 아들 코포를 찾기 위해 플로를 탐사하고 돌아온 듯 겉옷과 모자에 눈이 쌓이고 서리가 내려있는 모습의 엘더가 보인다. 워커 가 저택 앞까지 도착하여 옷에 쌓인 눈과 얼음 알갱이들을 털어내던 와중 엘더, 대문 앞의 우편물로 꽉 찬 우편함이 눈에 들어온 듯 작게 한숨짓는다.

    엘더 : (곤란하다는 듯) 오랜만에 저 우편함을 비울 때가 되었나…

    엘더, 우편함을 열어 그 안의 내용물을 전부 꺼내 확인하면서 광고 우편과 인터뷰 요청 편지를 골라내기 시작한다.

    엘더 : (편지봉투들을 하나씩 넘겨보며) ...그놈의 쓸데없는 인터뷰 요청은 끊임없이 오는군.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애초에 내가 어떤 무대에 섰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렇게 우편물을 골라내던 와중, 림의 대마법사 측에서 보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인장이 찍힌 편지 한 통을 발견한다. 편지봉투의 뒷면에는 딱딱한 글씨체로 '통보문(독/얼음 속성 마법사에게 해당)'이라 적혀 있다.

    엘더 : (심기가 거슬린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또 그 대마법사들의 같잖은 통보문인가.

    엘더, 대충 편지봉투의 윗면을 찢어 안의 내용을 펼쳐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엘더 :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독과 얼음 속성 마법사에게 고한다. 림의 사리타에 독 속성의 마력을 가진 괴생명체가 나타나 수많은 땅 속성 마법사들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일으킨 원흉은 독 속성 대마법사이며, 얼음 속성 대마법사 또한 그들의 공범이었음이 틀림없기에 대마법사 협회에서의 논의 결과 독과 얼음 속성 마법사의 림 출입을 금하기로 하였다. 림에 남아있는 해당 속성 마법사들은 일주일 내로 포탈을 통해 림을 떠나 각자의 지부로 이주하도록 한다. 지시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엘더, 통보문을 읽다가 눈살을 찌푸린 채 상황을 파악하려 급히 저택 안으로 들어선 뒤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애널라이저 창을 소환하여 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엘더 : (애널라이저의 화면에 나타난 림의 상황을 분석한 자료들을 눈을 가늘게 뜬 채 바라보며)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엘더, 애널라이저 창을 통해 사리타에서 일어난 사건을 조사하다 보라색을 띠는 소용돌이와도 같은 거대한 괴생명체가 수많은 땅 속성 마법사들을 습격한 영상을 발견한다. 그 안에는 형체가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무언가가 땅 속성 마법사들을 마구잡이로 집어삼켜 흙으로 완전히 분해해버리거나, 독성을 퍼뜨려 마력을 빼앗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충격적인 대학살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엘더 : (경악하며)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엘더, 그곳에 나타난 독 속성 괴생명체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한다.

    엘더 : (괴생명체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듯 눈을 가늘게 뜨며) ...뭐라 형용하기도 어려운 존재군… 이런 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생겨날 수가 없을 텐데,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엘더, 잠시 통보문의 내용을 떠올리다 고개를 가로젓는다.

    엘더 :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생각하듯 천천히 앞뒤로 배회하며) ...이 정도 규모라면 분명 나름 능력적으로 체급 있는 존재가 만들어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대마법사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데 말이지. 나에게 찾아와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독 속성 마법을 응용할 수 있을지 조언을 구하기도 하지 않았는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건 분명 대충 사건을 덮어버리고 그토록 혐오해대던 독과 얼음 속성 마법사들을 추방하려는 꼬리 자르기가 틀림없겠지. 그동안의 역사가 그랬으니까.

    엘더, 곤란한 듯 한숨을 푹 내쉰 뒤 두 손을 모아 잡는다.

    엘더 : ...나에겐 애초에 온전한 안식처 따위는 없었으니, 내가 림에서 나가는 건 보통 일이겠지만… (착잡한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되면 더는 쿼너를 보지 못하게 되는데…

    엘더, 쿼너가 있는 병실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병실 문을 열자, 방 안의 강력한 냉방에도 소용이 없는 듯 쿼너의 마력이 계속해서 누수되어 방 안은 이전보다도 더욱 낮은 온도가 되며 벽과 그가 있는 침대 주변에도 서리가 잔뜩 끼어있다. 쿼너, 힘없이 병실 침대에 앉은 채 흐릿한 눈빛으로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그의 주변에는 단 하나의 얼음수정만이 남아있다.
    쿼너에게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후 엘더, 그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해야 하는 처지에 마음이 무거워져 잠시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연다.

    엘더 : (할 말이 있다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부른다.) ...쿼너.
    쿼너 : (초연한 목소리로) ...알고 있어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곧 우리가 이곳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도…
    엘더 : ! (놀라며) ...어, 어떻게 그걸…?
    쿼너 : ...엘더가 없는 동안, 창 밖의 마법사들이 독이나 얼음 마법사만 보면 계속 림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는 걸 들었거든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전 느낄 수 있어요, 그 일로 제 친구 두 명이 세상을 떠나갔다는 것도…

    엘더, 유감이라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잠시 침묵한다. 쿼너, 슬픔을 담담히 받아들인 듯 지그시 눈을 감는다.

    쿼너 :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어주지 못한 게 아쉬워요… (엘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애써 미소 짓는다) ...미안해요, 괜히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네요...
    엘더 : ...아, 아닙니다. (헛기침하며) 당신이 좀 더 조용하게 쉴 수 있도록 창문을 미리 닫아뒀어야 했는데…

    쿼너, 괜찮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곤 잠시 창 밖을 바라본다. 엘더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지 말을 삼키듯 아랫입술을 한번 깨물고는 병원 침대에 몸을 뉘이며 눈을 감는다.

    쿼너 : (힘없는 목소리로) ...오늘따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네요… 떠나기 마지막 날 전까지는 계속 잠들어 있고 싶어요. 떠나는 날에 체력이 바닥나면 안 되니까...
    엘더 : ... (고개를 끄덕이곤) ...알겠습니다, 그럼… 푹 주무십시오.

    엘더, 쿼너에게 이불을 제대로 덮어준 뒤 병실의 조명을 좀 더 어둡게 조절한다. 그 후 조금 떨어져 있는 환자의 상태를 수치화하는 애널라이저 창이 띄워진 책상 앞에 앉아 착잡한 심정으로 한숨을 푹 내쉰다.

    엘더 : (슬픈 눈빛을 한 채 아래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결국… 그와 또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건가. (두 손으로 이마를 괴며) …더는 플로 쪽에서 베네노로 들어올 수도 없을뿐더러, 베네노에서마저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도 극히 제한될 테니…

    엘더, 한동안 그 자리에서 고뇌하다 결심이 선 듯 고개를 든다.

    엘더 : …어찌 되었든, 가능한 선에서 온 힘을 다할 수밖에… (쿼너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지금 그의 상태는 전보다도 훨씬 약해진 상태야. 사실 최악이라 할 수 있겠지. 수명도 거의 다 되어가는 상태에서 행여 그가 최대한 체력을 보존한 상태로 잠들었다 할지라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하니... (걱정의 한숨을 내쉬다 잠든 쿼너를 슬쩍 바라보며) ...그와 끝내 헤어질 마지막 날까지는… 밤을 새워서라도 그에게서 눈을 떼선 안 되겠어.

    엘더, 그렇게 이틀 동안 낮과 해 질 녘, 밤, 동틀 녘이 지나도 쿼너의 곁을 떠나지 않고 상태를 확인하며 간호하는데 힘쓴다. 시간의 흐름으로 창밖 하늘의 색이 바뀌면서, 병실의 매우 낮은 온도로 기침 또는 재채기가 나오며 몸을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거나, 졸음 섞인 하품을 내뱉거나, 쿼너의 곁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 화들짝 놀라며 깨어나는 등 춥고 피곤한 기색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잠을 쫓아내려 담배를 피우러 갈 새도 없을 정도로 어떻게든 쿼너를 돌보는 데 전념하는 모습에 잠깐씩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다 조명 페이드 아웃.

     


    #18 어두컴컴한 새벽, 워커 가 저택 병실

    엘더와 쿼너가 림에서부터 떠나기로 한 날 하루 전의 어두운 새벽, 쿼너가 누워 있는 병실 침대에 천천히 스포트라이트.
    쿼너, 나흘간의 잠에서 깨어나 슬며시 눈을 뜬다. 천천히 상체를 세우자 자신이 누운 병실 침대 옆쪽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떨며 잠들어 있는 엘더가 보인다.

    엘더 : (불편한 자세를 한 채 피곤한 기색으로 오들오들 떨며 겨우 잠들어 있다.) ...쿠울…
    쿼너 : ...엘더… (피곤한 기색으로 잠든 엘더를 보곤 안쓰러운 듯 미안한 표정으로) ...그동안 계속 날 돌봐주셨던 건가…

    쿼너,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엘더의 등 위로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덮어준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평소 입던 옷으로 갈아입은 뒤 펜을 들어 무언가의 쪽지를 써서 침대 옆 탁자에 놔두곤 비틀거리며 병실 밖으로 나가는 문 쪽으로 향한다.

    쿼너 : (잠든 엘더를 향해 잠시 돌아보곤 슬며시 미소지으며) 오늘 밤만큼은… 편안하게 주무세요, 엘더.

    쿼너가 밖으로 나간 이후 시간이 지나 천천히 조명이 밝아지면서 동이 트며 병실 창문을 통해 따뜻한 아침 햇살이 내리쬐고, 바깥에서 새들이 청량한 목소리로 지저귀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점차 포근해지는 분위기와 함께 공기도 함께 따스해져, 침대 주변에 잔뜩 끼어있던 서리가 녹아서 사라져 있다.

    엘더 :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서서히 잠이 깨는 듯 미간을 움찔거린다.) ...으음…

    엘더, 눈을 서서히 가늘게 뜬다. 어쩐지 평소와는 달리 포근하고 개운한 기분이 들어 천천히 상체를 바로 세운 뒤 팔을 들고 기지개를 죽 켠다.

    엘더 : …후우-… (몸이 축 늘어진 채 감긴 눈을 비비며) ...나도 모르게 깜빡 잠들어버렸나…

    엘더, 한쪽 눈만 겨우 뜬 채 쿼너가 누워있던 침대 쪽을 바라보지만, 그 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엘더 : …쿼너?! (그제야 자신의 어깨 위로 덮인 이불을 발견하곤) ...이, 이건-...

    엘더, 급히 주변을 돌아보다 병실 침대 옆 탁자에 놓여 있는 '엘더에게'라고 적힌 쪽지를 발견한다. 그 쪽지를 펼쳐 읽은 뒤 곧바로 옷을 챙겨입고 밖을 나선 이후 거센 눈보라가 치는 플로를 배경으로 힘겹게 앞을 나아가는 엘더에게 스포트라이트, 쪽지의 내용이 쿼너의 목소리로 읽힌다.

    내레이션(쿼너) : "엘더, 지난밤엔 좋은 꿈 꾸셨나요? 오늘은 엘더에게 전해줄 선물이 있어요. 늦기 전에, 우리가 처음 친해졌던 저의 집 앞 얼음 절벽으로 와 줘요. 꼭이에요!"
    엘더 : (힘겹게 눈보라를 헤치고 나아가며) ...항상 이런 식이지… 이상하게 기분 좋게 깨어난 아침에는 언제나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고. (걱정스러운 듯) 쿼너, 당신은 대체 또 무슨 일을…!

    그렇게 계속해서 눈보라를 헤치고 설산을 오르는 엘더의 모습을 멀리 보여주며 조명 천천히 페이드 아웃.

     


    #19 늦은 아침, 플로의 얼음 절벽 꼭대기

    아까보다는 시간이 지나 해가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꽤 많이 떠오른 상태. 기후가 험난했던 설산의 중턱과는 달리 얼음 절벽 꼭대기에 다다르자 맑은 하늘이 나타나며 평화롭게 햇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엘더, 겨우 얼음 동굴 끝을 빠져나와 한 손을 벽에 기댄 채 숨을 고른다.

    엘더 : (다급하게 얼음절벽 꼭대기까지 오르느라 숨이 차오른다.)  ...하아… 하아…

    얼음 동굴 너머의 설강화가 가득 핀 눈밭과 얼음 절벽 너머의 광경은 처음 쿼너를 만났던 그날과 다름없이 아름답다. 잠시 주변을 돌아보자, 얼음 절벽 끝에 쿼너가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엘더 : (다급히 부르며) 쿼너!

    쿼너, 엘더가 부르는 소리를 듣곤 뒤를 돌아본다.

    쿼너 : (핼쑥한 얼굴로 미소지으며) 아, 엘더...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정말로 와 줬네요... 기뻐요.
    엘더 : (걱정된다는 듯) 갑자기 사라지시면 어떡합니까, 혼자 그런 몸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쿼너 : … (말없이 얼음절벽 너머의 설원 풍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눈의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기억에 담고 싶어서요. 이 아름다운 광경을 헬라랑 코포도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엘더,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든 듯 잠시 멈칫한다. 쿼너의 뒷모습과 함께 보이는 눈으로 뒤덮인 풍경이, 어쩐지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엘더 : (불안한 목소리로)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쿼너 :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며) …엘더를 이곳에 처음 데리고 왔을 때, 여기서 같이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나요. 저는 엘더가 금방 자리를 떠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랫동안 저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죠. 플로는 워낙 춥고 기후도 불안정해서 다른 마법사들도 잘 찾아오지 않는 곳이라 이런 멋진 광경을 바라볼 일이 적은데… 그만큼 함께 플로의 풍경을 바라본 사람과의 추억에 대해서는 더더욱 기억에 남을 수밖에요.

    엘더, 말없이 가만히 쿼너의 말을 듣는다. 쿼너, 가만히 절벽 아래의 풍경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을 잇는다.

     

    쿼너 : (미소지으며) ...저는 항상 눈을 좋아했어요. 부드럽게 떨어지는 모습과 하얀 담요로 모든 것을 덮는 모습. 마치 평화롭고 끝없는 꿈 같아요.

     

    쿼너, 잠시 그렇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설경을 바라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는다.

    쿼너 : (담담하게 말을 이으며) 전... 알 수 있어요. 지금의 저에게는 이 풍경을 눈에 새겨 담고, 지난날을 추억할 시간조차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엘더, 언젠간 올 줄은 알았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은 듯 뒤로 주춤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엘더 :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당신에게서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쿼너.
    쿼너 : … (한동안 침묵하다 지그시 눈을 감으며) …이루지 못했던 것들이 많았지만, 제게 허락된 시간도 여기까지인가 봐요. (미안한 표정으로 엘더를 바라보며) 미안해요, 엘더… 제가 잠들기 전에는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차마… (고개를 돌리며) …제 입으로 말하기엔 너무 미안했어요. 엘더는 정말로 좋은 의사고, 오랜 시간 동안 저를 돌봐주셨는데도, 저는…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회복하지도 못했고, 가족을 찾지도 못하는 무능한 아빠였어요.
    엘더 : (목이 메여오듯) 그,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발 부탁이니 그 말 만큼은-...
    쿼너 : …그리고 이제… 정말로 제게 남은 건, 단 하나뿐이에요. 그러니까… 염치없지만, 제 마지막 선물을 받아주시겠어요?

    쿼너,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얼음 수정을 잡아 부들거리는 손으로 엘더에게 내민다.

    엘더: (안절부절못하다가 쿼너가 내민 얼음 수정을 보며) ...이건…?
    쿼너 : (떨리는 목소리로) 엘더… 엘더는 앞으로 150년을 더 살 수 있죠? 제 마지막 선물을… 꼭 소중히 간직해주세요. 혹시라도 이 얼음 수정이랑 똑같은 것을 가진 얼음 마법사를 보게 된다면, 제 아이일지도 모르니까… 멀리서라도 그 아이를 지켜봐 주었으면...
    엘더 : (눈물을 감추려는 듯 떨리는 손으로 모자를 앞으로 눌러쓰곤 쿼너에게서 등을 돌린 채) ...싫습니다, 그런 부탁은-...
    쿼너 : 엘더, 제발… (눈물을 글썽이며) 이대로 이걸 잡지 못하면, 한 줌의 눈송이로 사라져버려요... (엘더를 향해 애원하듯) 마지막 부탁이니까…

    엘더, 한동안 등을 돌린 채 진정하려는 듯 떨리는 숨을 크게 한번 내쉰 뒤 겨우 다시 뒤돌아서서 쿼너가 내민 얼음 수정을 받아든다. 얼음 수정의 소유가 엘더에게로 넘어가자 쿼너, 그대로 설경화 꽃밭 위에 힘없이 풀썩 쓰러진다.

    엘더 : 쿼너...! (눈물을 머금은 채 쿼너가 땅에 닿기 전에 붙잡아준다.)
    쿼너 : (힘없이 미소 지으며) ...이제… 안심이 되네요… (엘더의 손을 잡으며) 저의 마지막까지...곁에 함께 있어 주어서 고마워요, 엘더.

    엘더 :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듯) 아니, 고마운 건 오히려 접니다. 아무리 아픈 삶을 살더라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던 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쿼너!

    쿼너 :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힘없이 웃으며) 제 영원한 꿈속에서도, 엘더를 항상 기억하고 있을게요.

    엘더 : (흐느끼며) 저 또한... 당신을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쿼너.

    쿼너 : (속삭이듯) 고마워요, 엘더. 당신은... 제 최고의 친구였어요.

    쿼너, 편안히 눈을 감는다. 이후 엘더의 손을 잡고 있던 쿼너의 손에 힘이 풀리며 평온하게 숨을 거둔다. 쿼너의 시체가 눈가루로 변해 공중에 흩뿌려져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더스트[각주:6]가 일어난다.

     

    엘더, 죽은 쿼너의 몸에서부터 생겨난 눈더미를 다급히 손으로 모아보려 하지만 소용이 없다. 그리고 허망한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엘더 : ...결국 이렇게… 당신도 먼저 제게서 떠나버리시는 겁니까.

    엘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눈물을 흘린다. 그의 슬픔이 담긴 울음소리와 반대로, 주변의 풍경은 동이 튼 맑은 아침 햇살과 얼음 절벽의 풍경, 그리고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절경을 연출한다. 서서히 조명 페이드 아웃.

     


    #20 그 날 오후, 워커 가문 저택

    아침에는 맑았지만 낮이 되며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엘더, 축 처진 채 침통한 표정으로 텅 빈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워커 가 저택 안의 소파 위에 맥없이 널브러지듯 앉아 있다.

    엘더 :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결국, 떠나는 건 나 혼자인가… (허탈한 듯 헛웃음이 나온다.) ...난 대체 뭘 위해서...

    엘더, 한숨을 푹 쉬곤 눈을 감고 잠시 울적한 기분에 젖어있는다. 그러다 림의 대마법사 측에서 보낸 통지서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힘없이 걸음을 옮기며 서류와 편지들을 정리해 둔 책장으로 향한다. 
    서랍장을 열어 여러 문서를 확인하던 와중, 그 사이에 꽂혀 있는 연보랏빛의 살짝 구겨진 편지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와 잠시 멈칫한다. 그 편지봉투를 꺼내 뒤집어보니, 뒷면에 '엘더에게'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아 오래전 쿼너와 처음 만난 날 술집에서 열어보았던 바로 그 편지봉투이다. 그 안을 열어 그 안의 내용을 여는 동시에, 편지의 내용이 오래 전 떠나보냈던 아내, 위즈덤 칼린의 목소리로 읽히기 시작한다.

    내레이션(위즈) : 그동안 삶의 동반자였던 영감에게.
    어느덧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11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네.
    앞으로 내가 죽기까지의 시간이 하루도 남지 않았어.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이렇게 편지로 남길게.
    영감, 너와 함께 처음으로 망자의 숲에 가서 내가 말했던 '평생소원'이 뭐였는지, 기억나? 물론 기억 안 날 수도 있겠지, 벌써 1100년도 전의 일이니…….
    그때 내가 말했던 평생의 소원은 '그 누구도 차별 없이 평화로운 세계가 지속했으면 좋겠다'였어. 서로 증오하는 일 없이,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거.
    우리 예언자들은 한 번 조상의 실수로 엄청난 비난을 받아왔어. 그 때문에 예언자의 이름을 잇는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왔지. 아마도 그것 때문에 내가 상처를 받았었나 봐.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앞으로 정확히 500년 뒤에, 림에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예지를 받았거든. 정확히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세계의 마법사들 모두가 위험해지는 불길한 일인 건 확실해. 이게 예언자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로서 하는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예언이야.
    림을 지켜 줘, 영감. 더는 다른 이들이 우리가 겪어왔던 과거와도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이곳의 마법사들이 위험하지 않게. 우리 모두의 고향이 무너지지 않게.
    정말 어려운 부탁을 해서 미안해. 하지만 이게 나의 마지막 부탁이니까….
    영감과 죽는 날까지 함께하겠다고 맹세한 때부터도 각오한 일이지만, 막상 이렇게 먼저 떠나버리게 되어서 너무나도 아쉬워. 영감과 더 오래 함께하고 싶었는데… 내가 더는 없다고 해서 울지 말아줘, 영감. 내 마음도 아파지잖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할게.
    언제나 고마웠고, 사랑해, 엘더. 그동안 쭉 너와 함께해서, 정말 행복했어.
    너의 영원한 사랑, 위즈.

    엘더, 편지를 손에 든 채 눈물을 흘린다. 그가 흘린 눈물이 편지 위로 떨어지며 잉크가 번지기도 한다.

    엘더 :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눈물을 흘리며) …모르겠어, 위즈… 내가 정말로 해낼 수 있을지…

    그렇게 홀로 앉아 한동안 힘없이 눈물을 흘리는 엘더의 모습이 보이며 조명 천천히 페이드 아웃.

     


    #21 다음날 이른 새벽, 플람베제 북동부 사리타 부근 베네노로 향하는 포탈로 향하는 길

    아침이 다가오는 듯 점차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하지만, 아직 해는 뜨지 않아 주변은 어둑어둑하다. 갈대밭이 끝없이 이어진 황무지, 수많은 독 속성 마법사들이 베네노로 가기 위해 길을 걷고 있다. 그 사이에서 엘더, 모자를 앞으로 눌러쓴 채 한 손에는 커다란 트렁크를 들고 묵묵히 발걸음을 옮긴다. 주변의 다른 속성 마법사들이 독 속성 마법사들에게 날 선 눈빛을 보내기도 하며, 림에 거주하고 있었던 독 속성 마법사들이 하루아침에 자리를 잃고 강제로 추방되어야 하는 불합리한 상황에 다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이곳저곳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온다.

    독 속성 아이 : (울먹이며) 엄마, 안 가면 안 돼요? 난 림이 좋은데…
    독 속성 마법사 1 : (착잡한 표정으로 아이를 달래며) …어쩔 수 없단다, 대마법사님들께서 그렇게 법을 정해두었는걸…
    독 속성 마법사 2 : (불만 가능한 목소리로) 어째서 우리까지 추방당해야 하는 건데? 하여간 저 꼴통 대마법사 놈들이란-...
    독 속성 마법사 3 :(체념한 듯 고개를 저으며)  …어쩔 수 없잖아,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땅 속성 쪽이 독에 당했다니까 우릴 내보내고 싶은 건 당연하겠지…
    독 속성 마법사 4 : (이를 갈며) …언제까지 저 마력 하나 나지 않는 말라붙은 땅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진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하다가 저 녀석들이 어떻게 되나 보자고.

    엘더, 그러한 불만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시선을 내리깐 채 묵묵히 갈 길을 걷는다. 그때, 뒤쪽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가 엘더를 부른다.

    ??? : …워커 씨!

    엘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그의 눈앞에는 녹색 눈동자의 정장 차림을 한 여성 독 속성 마법사가 큰 트렁크를 두 손으로 든 채 서 있다.

    엘더 :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서기관 셸레.
    페레그린 : (머쓱한 듯 웃으며) 아아, 이제 저는 더는 서기관이 아니니까요. 그냥 셸레라고 불러 주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엘더, 인사치레로 안부를 물은 페레그린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 입을 다문다. 지난 수십 년간 전혀 잘 지내지 못한 것에 속에서부터 설움이 치밀어오르지만, 그녀가 이에 대해 알 리가 없으므로 표정을 숨긴 채 말없이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페레그린 :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한숨을 내쉬며) …갑자기 이런 처분을 당해서, 여러모로 혼란스러우셨겠어요.
    엘더 : (고개를 돌린 채 감정을 절제하듯) …저보다는 당신이야말로 더 상심이 크실 텐데 말입니다, 가족분들께서 고고학자라고 들었는데.
    페레그린 : 네에, 뭐… 갑작스럽게 사건이 일어나서 아예 림에 발을 못 들이게 된다는 게 조금 충격적이긴 하네요. 제 가문의 역사를 한 번 더 경험한 느낌이었달까…

    엘더, 지난 며칠간의 일로 높게 쌓인 정신적 피로로 페레그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목적지에 빨리 다다르고 싶을 뿐인 듯 영혼 없는 눈빛으로 원래 가려던 방향 쪽을 바라보지만, 페레그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페레그린 : (한 손으로 볼을 긁적이며) 한동안은 림을 탐사하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그곳으로 갈 수 있게 되지 않겠어요?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진 말자고요!

    페레그린, 애써 기운을 내보려는 듯 웃어 보인다. 잠시 그렇게 엘더가 착잡한 심정으로 잠시 페레그린을 묵묵히 바라보던 와중, 어느 순간 갈대밭 속에서 누군가가 아파서 앓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 : (숨이 거의 다 끊겨가는 듯 신음하며) …으윽…으…

    엘더, 누군가의 목숨이 다해가는 소리에 흠칫하며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급히 돌아본다. 

    페레그린 : …?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엘더가 고개를 돌린 쪽을 바라보며) 무슨 일… 있으세요?
    엘더 : … (잠시 가만히 갈대밭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아니, 아무것도.

    페레그린, 그런 엘더의 모습을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정신이 든 듯 깜짝 놀라며 말을 잇는다.

    페레그린 :  …아, 시간을 너무 지체해버렸네요. 베네노에 가서도 이것저것 정리해야 할 게 많아서… (앞서 발걸음을 옮기며) …또 나중에라도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페레그린, 엘더를 향해 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먼저 앞으로 달려나간다. 엘더, 가만히 서서 멀어져가는 페레그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소리가 난 갈대밭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누군가가 앓던 소리를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한 듯 주변의 독 속성 마법사들은 계속해서 갈 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그렇게 잠시 길에서 벗어나 높게 자란 갈대들을 헤쳐 들어가 보니, 그곳엔 온몸에 독이 퍼져 손과 다리 쪽이 시퍼렇게 변한 채 죽어가는 땅 속성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주변에는 독 성분이 있는 걸쭉한 보랏빛 액체가 늘어져 있는 것을 보니, 지난 사리타를 습격한 괴생명체의 잔재가 소녀의 마력을 집어삼키고 있었던 듯하다.

    땅 속성 소녀 : (자신에게 다가온 엘더에게 저항할 겨를도 없이 새파란 안색으로 꺼져가는 숨을 겨우 들이쉰다.) 흐윽…으으…

    엘더, 살짝 인상 쓴 채 말없이 소녀를 내려다보다가 갈등하듯 원래 가려던 길 쪽을 흘깃 바라본다. 하지만 소녀를 이대로 내버려두고 가기엔 마음이 걸리는 듯 한숨을 내쉬곤 그녀의 곁에 꿇어앉아 맥을 짚으며 상태를 살핀다. 그리고 자신의 겉 코트 안쪽에서 특수한 녹색 물약이 든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곤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리고 입안에 물약을 조금씩 여러 차례에 걸쳐 넣어준다. 땅 속성 소녀, 엘더의 물약을 받아마신 뒤 잠시 후 약간 정신이 드는 듯 겨우 천천히 눈을 뜨고 엘더를 바라보며 숨을 고른다.
    그때, 길을 가다 그 모습을 발견한 어느 땅 속성 마법사가 놀라서 다급히 달려온다.

    땅 속성 마법사 3 : (엘더를 소녀와 떼어놓으려는 듯 밀쳐내곤 노려보며 날카롭게 소리친다.) 뭐 하는 짓이야, 당장 떨어지지 못해?!

    엘더, 갑작스레 나타난 땅 속성 마법사의 행동에 뒤로 물러나며 주춤한다. 땅 속성 마법사, 엘더를 향해 잠시 날 선 눈빛을 보내다가 소녀의 상태를 살피곤 그녀를 안아 든다.

    땅 속성 마법사 3 : (소녀를 안아 올리곤 다독이듯 중얼거린다.) …이제 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땅 속성 마법사, 소녀를 병원으로 데려다 주려는 듯 그녀를 안은 채 급히 자리를 떠난다. 엘더, 뒤에서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서 바라보다 다시 뒤돌아 제 갈 길을 향해 걷기 시작하며 조명 페이드 아웃.

     


    #22 몇 시간 후 아침, 림과 베네노 사이의 바닷가

    조명 천천히 페이드 인, 수평선 저 멀리 해가 얕게 뜨며 연보랏빛 아침노을을 연출한다. 수많은 독 속성 마법사들이 포탈을 통해 베네노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함께 독 속성 마법사들의 발걸음을 부추기는 다른 속성 마법사의 호통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마법사 9 : (독 속성 마법사들을 향해 날 선 눈빛을 보내며 호통치듯) 당장 이동해, 어서!

     

    다른 속성 마법사들의 통제로 독 속성 마법사들이 거의  떠밀리다시피 포탈 안으로 이동한다. 이런 광경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다른 속성 마법사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마법사 10 : 어휴, 저 같잖은 것들이 한꺼번에 싹 나가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네.

    마법사 11 :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게나 말이야, 이제 저 녀석들도 없으니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살 수 있겠는걸.

    마법사 12 : 애초에 이렇게 되는 게 맞지, 빌어먹을 공존 따위는 무슨. 저 녀석들한테는 공존이라는 말도 아까워!

     

    그렇게 다른 속성의 마법사들이 비아냥대는 소리를 들어가며 엘더, 독 속성 마법사들 사이에서 함께 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베네노로 향하는 포탈 앞에 다다른 순간, 평생을 살아온 림에서부터 벗어나게 되니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마지막으로 림을 떠나기 전, 지난 추억을 짧게나마 되새기기 위해 쿼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겼던 얼음 수정을 꺼내서 잠시 바라보다가, 림의 풍경이 보이는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엘더 : (씁쓸한 표정으로) …이것으로 작별이군, 낡고 헤진 나의 빛바랜 고향이여.

     

    엘더, 더 미련이 생기기 전에 자리를 뜨려는 듯 검붉은 땅의 베네노가 보이는 포탈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엘더 : (포탈 너머의 베네노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이것이… 더는 없을 나의 마지막 무대가 되기를.

     

    엘더, 쿼너의 얼음 수정을 다시 집어넣고 결연한 표정으로 한 걸음씩 베네노로 이어진 포탈을 향해 움직인다. 포탈 안으로 들어간 엘더를 마지막으로 문이 닫히며, 마치 앞으로 남은 50년 후를 기약하듯 사라진 포탈 너머로 보이는 쓸쓸한 바다를 한동안 보여주며 조명 천천히 페이드 아웃.

     

     

    Snow-Dropped 폐막.

     

     


    ~ 오너 코멘트 ~

    본 로그는 2016년 6월에 짤막하게 3000자 정도로 작성했던 초안 대사집을 토대로 2017년 5월부터 리메이크 작업에 돌입하여 거의 6년 만에 완성한 글이다. 공백 포함 76200자, 공백 제외 56500자.

    이하부터는 본 로그 내용의 해설과 작성 후기를 적어보도록 하겠다.

     

    쿼너가 살던 곳에 잔뜩 피어있던 설강화.

    로그 제목 'Snow-Dropped'는 '눈이 내렸다'라는 과거형의 뜻도 되지만, 쿼너가 살던 얼음 동굴 너머에 무수히 피어있던 꽃 '설강화'의 의미 또한 존재한다. 설강화는 '갈란투스', '스노우드롭'이라고도 불리는 흰색 꽃이 피는 수선화과 식물로, ‘위안’과 ‘희망’을 상징한다. 이는 엘더가 위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500년을 버텨내기까지 쿼너가 삶의 희망이자 위안이었음을 의미하는데, 시간이 지나 쿼너가 수명이 다해 사망하고 나서도 설강화는 변함없이 그가 죽은 자리에서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의 몸은 눈으로 흩어져 사라질지언정, 여전히 엘더에겐 그가 앞으로 삶을 나아갈 희망과 의지가 될 존재임을 암시를 남기고 있다.

    본 로그에서는 이야기가 극본의 형식으로 진행되나, 사실은 엘더가 자신의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인생을 온전히 받아들이길 거부하여 하나의 희곡처럼 묘사하는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니까 글 자체만 보면 전지적 작가가 엘더의 이야기를 관찰하고 써내려간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엘더 스스로 직접 자신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엘더가 위즈와 사별한 이후 새롭게 만난 친구 쿼너와 함께 지낸 450년간의 세월을 그리고는 있으나, 이야기의 주제인 ‘소중했던 친구와의 깊은 우정과 마음 아픈 사별’과는 달리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위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자그마치 500년의 세월을 버텨내는, 쿼너와는 크게 상관없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런 목표조차 없었다면 엘더는 일찍이 자살하고도 남았을 것이지만, 목표가 뚜렷했더라도 쿼너가 없었다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중간에 자살했을 것이 뻔하므로 일부분은 쿼너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였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본 로그는 엘더의 시점에서 작성된 글이므로 일부 등장인물은 본명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데, 모든 등장인물과 색상 표기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

    엘더 워커
    위즈덤 칼린
    쿼너 (=얼음 속성 마법사)
    엘런 칼린
    페레그린 셸레 (=여성 독 속성 마법사)
    헬라다
    땅 속성 마법사 1 - 샴, 첼의 아버지.
    땅 속성 마법사 2 - 올라, 첼의 어머니.
    땅 속성 마법사 3 - 루안, 첼의 친척 오빠.
    땅 속성 소녀 -
    자연 속성 마법사 - 바르베
    독 속성 아이, 독 속성 마법사 1~3, 마법사 1~12 - 엑스트라

     

    처음 쿼너가 다가왔을 때 엘더가 그를 그렇게까지 경계하지 않았던 이유는 외로움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가 별다른 사심이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엘더는 눈치가 빠르고 상대에 대해 잘 파악하는 편이기에 만약 쿼너가 엘더가 유명한 연극배우인 것을 알고 사심을 채우기 위해 접근했다거나, 사기를 치기 위해 다가오거나 사이비 단원이었다면 곧바로 알아채고 방어적으로 나섰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초면에 갑자기 친근하게 다가오는 쿼너를 경계하긴 했지만, 이는 그를 의심하거나 나쁜 사람으로 생각해서가 아닌, 아직 쿼너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데다 그동안 엘런의 습격과 속성별 수명 차이로 다른 친했던 동료와도 일찍 사별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일어나면서 타인과 친해지는 건 결국 상처로 남을 뿐이라고 여기게 되면서 방어기제가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07에서 엘더가 급작스럽게 독물을 토하던 증세는 내가 정신적으로 심히 불안정했던 고3 때와 대학생활 시절 겪은 공황 증세를 토대로 묘사되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숨이 가빠지고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면서 정신을 잃을 것 같다가, 결국 투명한 위액을 토해내고 안정을 취하면 금방 괜찮아진다. 심지어 병원에 가더라도 특정한 질병으로 진단받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엘더는 유전적 결함이 있긴 하지만…) 그리고 이런 증세가 또다시 나타날 것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 대한 것도 동일하다.

     

    엘더가 페레그린과 협력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쿼너와 헤어지지 않아도 되었지 않나 싶을 수 있지만, 독 속성인 자신을 경계하는 헬라다를 보며 자신으로 인해 쿼너의 가정에 불화가 생기지 않길 바랐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언제라도 엘런이 자신에게 또 간섭해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독제 또한 15년이나 꾸준히 투여받은 뒤에서야 완화된 데다 한 번이라도 중간에 멈추면 다시 곧바로 독이 분출되곤 했기에 자신의 몸상태가 온전하지 않았던 것도 있다.

    #14에서 엘더가 쿼너와 한번 헤어진 이후 수년 뒤 술을 마시고 나와서는 계속해서 왼쪽으로 이동하는데, 이는 쿼너를 만나기 이전인 아내 위즈를 잃고 혼자였던 외로운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이후 플로에 눈사태가 일어나고 그 소식을 들은 엘더가 다시 오른쪽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과거로 완전히 돌아가지 못하고 끊긴 인연을 다시 이어나가려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02에서 엘더가 쿼너와 처음 만나고 쿼너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 지던 상황과, #16에서 쿼너가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뒤의 상황은 의도적으로 서로 연출 구조가 비슷하도록 설계하였다.

     

    엘더가 쿼너를 플로의 병원으로 옮기지 않은 이유는 플로의 현장은 거대한 눈사태가 발생하여 위험한 상태였고, 쿼너와 헤어지고 그를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서서히 떠나보내면서 플로의 상태를 일부러 외면했다가 결국에는 그곳에 눈사태가 일어나고 쿼너가 사고에 휘말려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 플로의 상황도 어느정도 복구된 시점에서는 더 안전할지도 모르는 플로의 병원으로 옮겨보려는 시도를 해보곤 했지만, 의료진들은 쿼너의 희귀한 유전적 특성인 얼음 수정을 복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치료를 거부하였다. 갑작스러운 독 분출 증상도 셸레 가문에서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완화된 상태였고, 또한 행여나 그때 엘런이 습격하더라도 쿼너를 지켜내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에 의사로서 자신이 책임을 다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엔 자신이 끝까지 쿼너를 맡아 그를 돌봐주기로 한 것이다. 그나마 쿼너가 그동안 재배했던 서리과를 팔고 저축해놓은 돈이 많아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자연적 세빙 현상, '다이아몬드 더스트'. 쿼너가 생을 마감하고 다이아몬드 더스트로 흩어지는 장면은 대략 이런 느낌일 것이다.

    엘더는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에 매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매우 어렸을 때부터 아끼던 여동생이 병으로 일찍 죽어버렸고, 위즈와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하고 오자마자 엘런의 방화테러로 한순간에 가족을 모두 잃어버렸으며, 이후로도 친한 지인이라도 생기려고 하면 엘런이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거나 살해했고, 위즈마저도 과거 그녀의 조상이 저지른 잘못으로 저주를 받아 갑작스럽게 단명하고 말았다. 게다가 다른 속성의 마법사들에 비해 수명도 압도적으로 긴 2000년씩이나 되기에[각주:7], 언제나 언제 자신을 떠나갈까 두려워한다. 그런 그에게 쿼너의 존재는 단순히 소중한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시련과도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게다가 쿼너와 함께 있을 때 그가 내뿜는 한기로 몇 번은 감기에 걸리기도 했으므로, 어떻게 보면 둘의 운명은 애초부터 온전하게 끝맺을 수가 없었던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면서 내내 착잡하고 씁쓸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사람으로 예를 들자면 누군가와 둘도 없는 친구로 사귀었는데, 함께 지낸 지 20년 만에 갑자기 단명해버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질 것 같다. 실제로 나의 어머니도 내가 초등학생 때 교내 도서관 사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처음 만난 다른 학부모와 거의 15년을 함께 절친으로 지냈는데, 작년인 2021년 말에 그분께서 갑작스럽게 자궁경부암 말기 진단을 받고 몇 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그때부터 1년이 지난 이후 지금까지도 어머니는 가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라며 되뇌곤 하신다.

    그것 말고도 마치 아끼던 반려동물의 생애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듯한 느낌 또한 들었다. (물론 쿼너는 엘더의 반려동물이 아니긴 하지만… 엘더는 수명이 2000년인 것에 비해 쿼너는 500년밖에 되지 않는다.) 과거 어렸을 적 키우던 강아지도 나중에는 결국 암에 걸리는 바람에 결국 안락사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그걸 지켜보며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는 나중에 여건만 된다면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시간이 지나 키우던 고양이의 죽음까지도 감당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쿼너를 떠나보내고 5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엘더는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히 베네노의 바닷가를 거닐 때 가끔가다 바다 너머 플로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느껴지면 특히 그를 더욱 떠올리곤 한다. 작년 가을, 나의 조부모님께서 1개월 간격으로 두 분 모두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외가 쪽 친척 한 분도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을 2개월 이내에 3번 씩이나 갔다온 적이 있었다. 심지어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어머니의 지인 분도 돌아가셔서, 겉으로 표현은 잘 하지 않았지만 그 연속적인 일들이 일어나던 당시의 차가운 온도가 지금까지도 몸에 기억되어서 지금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 날이 점점 추워지는 게 느껴지면 쓸쓸함과 공허함이 느껴지곤 한다. 엘더가 느끼는 그리움 또한 성질은 다르지마는, 그 시린 찬바람으로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지는 느낌만큼은 내가 느끼던 것과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에 그리 익숙하지 않다. 아직 그렇게 나에게 가까운 사람이 생을 마감한 경우는 겪어보지 않아서 지금은 그렇게 실감은 잘 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때의 나의 모습은 지금으로선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상실감만큼은 지금 상상해보아도 마음이 저릿해져 오는 걸 느낄 수 있다.

    미래의 나는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까, 아직도 감히 예상할 수가 없다. 찬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누군가가 떠올라 마음 한편이 아려오는 엘더처럼, 어쩌면 나도 가을이 시작될 때마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아릿함을 잊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별개로 이 글을 쓰면서 한번은 '쿼너가 만약에 여자였다면 어떻게 됐을까?'라고도 생각해 봤다. 어쩌면 엘더 쪽에선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차피 둘의 극심한 수명차와 함께 점차 강해지는 자신의 독성으로 서로 끝이 좋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위즈를 위해 시간을 버텨내는 것에 더 집중하여 결국 둘 사이엔 그 이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은 이 녀석이 좀 많이 고지식해서 굴리기 재미없을 때가 있다… 물론 엘더는 이상형으로서 차가운 체온을 가진 사람보단 따뜻한 체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하므로, 쿼너와는 어떤 방향으로든 딱 절친 정도까지만 관계가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1. 림 세계의 얼음 속성 마법사는 온도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본문으로]
    2. 얼음 마법에는 내상 치유의 효과가 있는데, 얼음 속성 마법사들의 고향이자 얼음섬인 플로의 만년설에서부터 생겨난 물을 마셨기에 해장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본문으로]
    3. 서리과는 과육이 차갑다. 엘더 입장에선 마치 겨울에 산 중턱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격. [본문으로]
    4. 엘더는 과거 가족을 전부 잃은 사건으로 화기에 트라우마가 있다. [본문으로]
    5. 독성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이다. (독 속성 마법사를 제외한) 일반적인 사람의 몸무게 kg당 치사량(g)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6. 세빙(細氷)이라고도 불리우며, 한랭 지역에서 기온이 아주 낮을 때에 공기 중의 수증기가 미세한 얼음 결정이 되어 공기 중에 떠다녀 햇빛에 번득거려 빛나 보이는 현상. [본문으로]
    7. 암흑 속성은 90년, 빛 속성과 인간은 100년, 순혈 물&화염 속성/인간 혼혈 마법사는 200년, 혼혈 마법사는 400년, 얼음 속성은 500년, 자연 속성은 1000년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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